더 저널리스트-조지 오웰
조지 오웰 씀, 김영진 엮고 옮김/한빛비즈·1만7000원
마흔일곱, 짧은 생을 살았다. 식민지 인도 태생 영국인. 본디 이름은 에릭 아서 블레어(1903~1950). 급성 폐출혈로 고독하게 숨을 거두기까지 전 생애가 세계사적 격랑의 한가운데 있었다. 열네살 때 러시아 혁명을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 세계 대공황,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식민 제국주의 종말, 냉전시대의 개막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20세기 역사>(1994)에서 ‘파국의 시대’(1부)라고 일컬은 바로 그 시기였다. 조지 오웰(필명) 이야기다.
오웰은 인간 존엄성을 짓누르는 권력을 고발하고, 기술만능주의의 암울한 미래를 경고한 작가였다. <동물농장>(1945)과 <1984>(1949)로 잘 알려졌지만, 자유와 평등, 인류애의 이상을 좇는 현장에 직접 뛰어든 전사이자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부랑자와 접시닦이로 밑바닥 삶을 직접 겪었고, 탄광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기록했다. 스페인 내전엔 공화파를 지지하는 좌파 의용군으로 참전했으며, 아나키즘 성향의 좌파 정당 당원이었다.
영국 런던 햄프스테드의 폰드가와 사우스엔드가의 모퉁이에 있는 조지 오웰 기념 조형물. 오웰이 1934년부터 그다음 해까지 이 거리에 있는 서점에서 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서점은 오래전에 없어진 상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더 저널리스트-조지 오웰>은 상상이나 허구의 재구성(문학)이 아니라 실제 현실을 증언하고 해석(저널리즘)한 작가의 육성을 통해 그의 삶과 철학을 보여주는 책이다. 수백편에 이르는 기사와 칼럼, 기고문 가운데 57편을 추려 우리말로 옮기고 엮었다. 책에 소개된 글의 대부분이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것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이번 책은 지난해 헤밍웨이 편으로 첫 권이 나온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조지 오웰뿐 아니라 헤밍웨이와 카를 마르크스(3권 예정)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사상가이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 오웰의 글들을 집필 시기가 아닌 주제별로 편집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의 폭과 통찰의 깊이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평등, 진실, 전쟁, 미래, 삶, 표현의 자유까지 모두 6부로 짜였다.
오웰이 저널리스트로 데뷔한 건 38살 때인 1941년 <비비시>(BBC) 라디오 방송의 대본 작가로 활동하면서부터다. 곧이어 가디언 미디어 그룹의 일요판 신문 <옵서버>에도 열정적인 기고자로 이름을 올렸다. 1943년엔 좌파 잡지 <트리뷴>의 문학 편집자로 옮겨 수십편의 서평과 칼럼을 쓰면서 <동물농장>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에는 <옵서버>와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의 전쟁 특파원으로 전장을 누볐다.
1941년 <비비시>(BBC)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조지 오웰. 출처 위키미디어
그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1940년대 유럽은 대혼돈의 시기였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와 국가주의(혹은 민족주의)의 팽창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저소득층, 식민지 노동자, 외국인과 난민, 유색인종, 여성 등 사회적 취약층의 삶은 위태로웠다. 이런 현실은 오웰의 섬세한 감각에 포착돼 글로 투영됐다. 예컨대, 런던의 한 댄스홀이 주요 고객인 미군을 의식해 유색인종 출입을 금지한 것에 오웰은 분노한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예의주시하고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인종 문제는 소란스러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야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사례를 아는 사람은 누구든 이를 폭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극소수 인종 우월주의자들이 계속해서 못된 짓을 할 테고,… ”(‘유색인 차별을 멈추려면’, 1944년)
오웰은 파시즘과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면서도 이상과 현실을 분별했으며, 깊은 통찰력으로 본질을 보려 했다. “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 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뿐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 전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짓말과 독선을 부추긴다.”(‘진실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 재건 과정에서 패전국 독일에 대한 식량 원조에 반대하는 의견에는 이렇게 반박했다.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당시 현실파의 주장은 독일을 봉쇄하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독일에 봉쇄선을 세웠다. 그리고 1940년, 우리에게 폭탄을 떨어뜨린 독일 청년들은 그때 우리가 굶긴 그 독일 아이들이었다.”(‘굶주림의 정치’, 1946년)
영국 그레이트맨체스터주 위건 부두에 있는 깁슨 창고는 1777년에 지어졌다가 1984년 재건됐다. 이 곳은 조지 오웰의 작품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주무대였다. 현재는 ‘위건 부두의 오웰’이란 이름의 레스토랑 겸 펍으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오웰이 얼핏 사소해 보이는 집안일에도 문명사적 관점을 취한 것도 신선하다. “설거지 한 무더기를 처리할 때마다 나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놀라곤 한다. 인간은 바닷속을 여행하고 구름 위를 비행할 수 있으면서 설거지처럼 시간을 잡아먹는 일상적 골칫거리 하나 없애지 못하고 있다 (…) 최대한 많은 지식을 투자해 가정집 내부 구조를 합리적으로 바꾸는 방법이 (…) 사회 전체로서는 엄청난 양의 노동력과 연료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원시적인 가사노동의 굴레’ ‘가사노동의 해방에 대하여’, 1944년)
오웰은 저널리스트로서 자유 언론에 대한 신념도 분명했다. “이번 전쟁(2차 대전)은 생각의 자유를 지키려는 싸움이다. (…) 영국의 제국주의가 나치즘보다 더 나쁘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 다만 영국에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쓰는 게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 내가 원하는 건 이런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는 것이다.”‘(‘표현의 자유에 대해’, 1944년)
“전쟁은 유산계급이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만 일어난다”라는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해 제작한 포스터.
1946년 11월, 오웰은 <트리뷴>에 쓴 칼럼을 유엔 총회 소식으로 시작한다. 그 시간에도 그리스에선 내전이 한창이고, 인도에서 간디의 단식은 위태로운 지경으로 치닫고, 미국에선 탄광 파업이 계속되며, 예루살렘에선 또 폭탄이 터졌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 문명이 존속할 거란 사실을 믿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오웰이 칼럼 말미에 쓴 탄식과 호소는 70년이 흐른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물어야 한다. 약자를 괴롭히려는 요구가 어쩌다 현시대 인간의 주된 행동의 동기가 되었는가? 좀처럼 누구도 묻지 않고 아무도 답을 내놓지 않는다.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의 아침 신문 1면에 아주 가끔 좋은 소식이 실릴지도 모른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