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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낱말과 낱말이 손깍지 끼고 빚어낸 풍경

등록 2018-03-15 20:13수정 2018-03-15 20:25

이정록 시인 겹낱말 시집 ‘동심언어사전’
겹낱말 316개 표제 시로 노래해
“말속에 담긴 지혜와 상상력 만나보세요”

동심언어사전
이정록 지음/문학동네·1만6500원

“낱말과 낱말이 만날 때,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과 즐거움, 흥, 능청이 생겨납니다. 책 제목을 ‘동심언어사전’이라 한 게 그 때문이죠.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말도 그 안에는 슬쩍 눙치고 넘어가는 게 있어요. ‘그 사람 숟가락 놨다메!’ 같은 말이 그런 식이죠. 그래서 이 책에 묶인 시들은 전반적으로 명랑한 편입니다.”

이정록 시인이 순우리말 복합어 316개를 표제로 삼은 시를 묶은 시집 <동심언어사전>을 펴냈다. ‘가갸날’부터 ‘힘줄’까지, 순우리말로 된 낱말 둘 이상이 합쳐져 새롭게 만들어진 ‘겹낱말’, 그러니까 복합어들이 모였다. 가령 이런 식이다.

“굴뚝연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의/ 차가운 등짝을/ 덥히고 왔기 때문이지”(‘굴뚝연기’ 전문)

“나비는 꽃밥상에서/ 꽃받침대까지가 한 살이다./ 평생 꽃놀이다./ 꽃가마 타고 가다가/ 꽃상여에서 내린 거다.”(‘꽃잠’ 부분)

시집을 내고 14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이정록 시인은 “2016년 정초부터 이듬해 2월까지 1년 남짓 사이에 200편이 넘는 시가 쏟아졌다”고 말했다. “겹낱말 시뿐만 아니라, 당시 집중하고 있던 청소년 시를 포함해 한 해 동안 무려 500편 정도를 쓴 것 같다”고 돌이켰다. 시마(詩魔)에 들린 것이다.

“2016년 1월2일 오후 충남 홍성 결성향교에서 열린 ‘만해문예학교’ 첫 시간이었어요. 연세 지긋한 분에게 동시를 설명하느라 ‘콧방귀’와 ‘황소걸음’을 예로 들다가 시마란 놈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지요. 영감이 오는 게 반갑긴 했지만,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 같아 주저했어요. 시인이 얼추 3년 동안 시 50편을 써서 시집 한권을 내는데, 사전이라면 4~500편은 써야 하지 않겠어요? 그 세월에 겁이 난 거죠.”

서울 인사동으로, 공주 마곡사로 두어 주 동안 도망을 다녔다. 쓰지 않으려고. 그래도 시마는 뿌리쳐지지 않았다. 입으로 겹낱말 시를 쓰던 그에게 사람들은 어서 시로 쓰라고 재촉했다. “어느 날 보니 저도 모르게 침대에 엎드려 시를 쓰고 있더군요. 하하.”

겹낱말 316개를 표제로 삼은 시집 <동심언어사전>을 낸 이정록 시인. “옛사람들이 만든 말을 들여다보면 그분들의 풍부한 감수성과 시심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교사인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때는 마침 겨울방학이어서, 새벽 네다섯시에 눈을 떠서는 오전 열시 무렵까지 매일 시를 썼다. 보통 하루에 너댓편, 많게는 일곱편에서 아홉편까지 썼다. 휴대폰 속 ‘1인 밴드’가 원고지였다. “생각은 빠른데 타자가 늦어서 달려가는 생각을 놓치면 곤란하니까” 한 손가락으로 빨리 칠 수 있는 타자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그렇게 1년을 보냈더니 몸이 껍질 벗은 꽃게 같아지더군요. 태안 말로 보름사리 사시랭이(사시랑이: 가늘고 약한 물건이나 사람) 꼴이었죠.” 그렇게 몸의 살을 여의면서 이런 시들을 얻었다.

“지는 게 이기는 거야.// 보자기 같은 연못에/ 가위처럼 발을 벌리고 개구리가 뛰어들지? 연못이 져주는 거야.”(‘가위바위보’ 부분)

“아기보자기에서 나와/ 책보자기 펼쳐 공부하고/ 떡보따리 풀어 함께 먹고/ 이야기보따리 끌러/ 웃음보따리 나누다가/ 짐보따리 이고 지고/ 일보따리 품앗이로 풀어헤치다가/ (…) / 삼베보자기에 싸여/ 무덤보자기에 캄캄하게 누웠다가/ 하늘보자기에 포옥 안겨/ 구름보따리로 떠나간다.”(‘꽃보자기’ 부분)

“제가 워낙 호기심이 많고 장난기도 승한 편이에요. 그래서 겹낱말을 만나면 그 말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추측하고 상상해 보게 되곤 해요. 예전 농어촌 사람들의 삶과 풍경, 그 속에서 그 말을 사용하는 장면이 떠오르곤 합니다.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건 그 안에 담긴 삶의 지혜와 상상력 역시 잃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시를 썼다. 어느 정도 수량이 쌓인 뒤에는 사전을 순서대로 뒤지며 빠뜨린 낱말을 챙겼다. ‘손톱그림’(매니큐어), ‘사자고추’(피망), ‘토끼뜀’(파도의 거품) 같은 북한말도 포함시켰다.

“이 책은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 데나 펼쳐서 술렁술렁 읽다 보면 언어가 스스로 독자에게 말을 걸고 손짓을 할 거예요. 그 말을 따라 가며 즐기시면 됩니다. 저도 즐겁게 썼으니 독자들도 모쪼록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해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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