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
송영 지음/문학세계사·1만4000원
작가 송영(1940~2016)의 유고 소설집 <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가 출간되었다.
표제작인 미완성 중편과 나머지 단편 셋은 모두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나’를 화자로 내세운 기행문 형식이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경계가 불분명한데, 자신의 경험을 바탕 삼아 최소한의 허구를 가미한 듯하다. 해병대 장교 훈련 중 탈영하고 7년 수배 끝에 체포되어 군 감옥 생활을 한 사연,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관사를 떠돌던 어린 시절, 작품 활동과 만년의 정치 ‘외도’ 등 작가의 이력이 책 곳곳에 파편처럼 박혀 있다.
기행문 성격 소설들이기 때문에 딱히 주제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표제작은 미완성이고, 대만 이야기인 ‘화롄의 연인’에 대해서도 작가는 “프롤로그에 지나지 않는다”고 밝혀 놓았다. 넷 중 가장 분량이 적은 ‘금강산 가는 길’은 더구나 소설이라기보다는 기행문의 성격이 짙다.
2016년 타계한 소설가 송영의 유고집 <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가 나왔다. 책에도 등장하는 박노자 교수는 “국경을 넘어 따뜻한 마음으로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는 독후감을 밝혔다. 문학세계사 제공
이 책을 읽는 재미는 정작 따로 있다. 앞서 말했듯 여기 실린 자전 소설들은 작가 자신의 경험과 사유를 고스란히 담았다. 연구자에게나 일반 독자에게나 작가 송영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작가를 만나는 즐거움 못지않게, 조연 및 단역 들을 추측하고 확인하는 재미도 쑬쑬하다. 조연급 인물을 대부분 이니셜로 표기했는데, 전후 맥락을 따져 보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라면 열 봉지와 50달러’는 러시아 출신 박노자 교수 이야기다. 러시아 이름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애칭 ‘발로자’는 2003년에 낸 소설집 <발로자를 위하여> 표제작에도 주인공으로 나온다. ‘라면 열 봉지…’에는 1992년 작가가 동료 문인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를 여행할 때 안내를 맡았던 대학생 발로자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고학생으로 처음 만나 친구의 인연을 맺은 사연부터 결혼식 주례를 맡고 대학교수 임용에 도움을 준 일까지 두사람의 우정의 연대기가 자세하다.
발로자와 달리 나머지 작품들에서 비중 있는 조연들은 거의가 이니셜로 처리된다. 그러나 필요한 정보가 적절히 제시되어서 정체를 짐작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화롄의 연인’은 타이완의 한국문학 전공자 장숙영 교수 이야기인데, ‘나’의 타이완 여행에 동행했던 소설가 H와 관련해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당시 신군부 치하에서 H는 신문 연재의 필화 사건으로 아주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런가 하면 “이른바 진보 문학계의 새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되곤 했었다”는 후배 작가 김 역시 특정 인물을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이 소설 말미에서 장숙영은 젊은 시절 한국 유학생한테 받았던 연애편지 묶음을 ‘나’에게 건넨다. “동양 고전, 특히 공맹(孔孟)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인”이자 “국민 스승”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스트”라는 상반되는 평을 듣는다는 이 인물의 정체 역시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작가가 이 작품을 가리켜 프롤로그일 뿐이라고 한 까닭은 ‘화롄의 연인’의 본론이 되어야 할 장숙영과 이 인물의 연애 이야기가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200자 원고지로 400장이 넘는 표제작은 카자흐스탄 고려인 출신 러시아 소설가 A의 이야기다. “키가 좀 작은 편이나 몸집은 단단했고 코밑에는 수염을 기른, 나와 거의 비슷한 또래의 남자”인 이 작가와 관련해 송영이 쓴 글들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다. 미완인 이 소설에서 A와 ‘나’는 각별한 친분과 우정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한 갈등과 대립을 보이는데, 미처 쓰지 못한 마무리 부분에서 그 갈등이 어떤 식으로 해소되었을지 아니면 아예 폭발하고 말았을지 궁금증이 남는다. 한편 이 소설에는 “누군가가 공개 지면에 나에 관한 모함성 글을 게재했(으며), 그 글 게재자는 소싯적부터 나와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동료 작가였다”라는 대목도 나오거니와, 눈 밝은 이라면 그 작가의 이름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왜 니나…>를 주변 사람들에 관한 뒷담화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인물의 특징과 장단점을 요령 있게 잡아내어 표현하는 작가의 눈썰미와 이야기 구성 능력이야말로 이 유고작들에서 빛나는 부분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