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순 지음/강·1만4000원 “대학에 와서 당신 소설을 다시 읽고 나서는 나는 작가 되기 글렀다 싶어 소설 쓰기를 포기했었죠 유머와 언어 구사력에다 풍부한 어휘력에 놀라서요” 소설집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에 실린 단편 ‘신천을 허리에 꿰차는 법-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나오는 이 대목을 작가 박찬순(사진)의 육성으로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박찬순은 2006년, 여느 작가들에 비해 매우 늦은 나이에 신춘문예로 등단해 그동안 소설집 두 권을 냈다. 앞서 인용한 작품에도 나오는, “평생 번역으로 먹고살았”다는 구절처럼 소설을 쓰기 전에는 번역에 종사했다. 인용문에, 마침표를 비롯한 구두점이 없는 데 대해 의아해할 독자도 있으리라. 여기 등장하는 ‘당신’이란,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박태원의 단편 ‘방란장 주인’에 대한 오마주로 읽힌다. ‘방란장 주인’은 모더니스트 박태원이 전체가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을 시도한 실험적 작품이었다. 이 단편 역시 한 문장 소설을 목표로 삼았고, 작가는 소설 마지막에 딱 한번만 마침표를 찍었다. 작가 자신으로 짐작되는 화자가 대구 신천에서 구보 박태원의 혼령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이 소설 말고도 이 소설집에는 구보에 관한 오마주에 해당하는 단편이 하나 더 있다. ‘성북동 230번지’가 그 작품인데, 제목에 쓰인 번지수는 구보가 책의 인세 대신 출판사로부터 받아 식구들과 함께 살았던 집의 주소다. 이 작품에서는 탈북 대학생과 남한 사람인 그의 육촌 여동생이 수업 발표를 위해 성북동 시절 구보의 흔적을 추적한다. 문학사에 대한 작가의 감각은 ‘레몬을 놓을 자리’와 ‘테헤란 신드롬’에서도 엿볼 수 있다. ‘레몬을…’은 시인 정지용의 교토 도시샤대 유학 시절, 그리고 같은 무렵 도쿄대 영문과에 다니며 동인지에 단편 ‘레몬’을 발표한 일본 작가 가지이 모토지로의 이야기를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는 구성이고, ‘테헤란…’은 레지던시 작가로 이란에서 현지 학생들에게 한국 문학을 가르치는 소설가를 등장시킨다. 역시 레지던시 작가로 테헤란에 머물렀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이 불륜 이야기라며 간섭하는 학당장과 승강이를 벌이는 한편, 이 소설 문장의 음악성을 이국의 학생들에게 알려주고자 분투한다. 캠퍼스 부근 서점가 뒷골목 비밀 가게에 옛 이란 시인 하이얌의 사행시 한 구절을 암호처럼 대고 들어가 금지된 술을 사는 장면은 지난달 방한한 이란계 프랑스 작가 마리암 마지디의 소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을 떠올리게도 한다. 지난해 나온 최은미의 장편과 제목이 같은 단편 ‘아홉번째 파도’는 그 장편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화가 이반 아이바좁스키의 동명(同名)의 그림을 매개 삼아, 세월호의 아픔을 그린다. 그런가 하면 ‘북남시집 오케스트라’에서는 남과 북의 청소년 단원들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서해 최북단 섬에서 연주회를 한다는 설정을 통해 분단 현실에 대한 색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성북동 230번지’와 ‘아그리파를 그리는 시간’에 나란히 등장하는 탈북 청년 ‘미리날’이라는 인물과 함께, 분단 문제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알게 한다. 최재봉 기자, 사진 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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