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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틀린’ 말은 없다, ‘다른’ 말이 있을 뿐”

등록 2018-04-05 19:53수정 2018-04-05 19:56

국어국문학자 정승철 교수
“표준어는 국가주의 산물” 비판
다양한 사료와 역사적 맥락으로
방언의 가치와 의미 복권 강조

방언의 발견
정승철 지음/창비·1만6000원

“계백아…, 니가… 거시기 해야겄다.”(의자왕이 계백에게)

“우리의 전략전술적 거시기는 한마디로, 머시기할때까지 거시기한다!”(계백의 작전 명령)

“니들 다 들었제? ‘거시기’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때까지, 총공격은 절대 몬한다카이!”(첩자의 보고를 들은 김유신)

<황산벌>(2003년)은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맞선 최후의 전투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 왕과 장졸들의 질펀한 함경도·전라도·경상도 사투리 설전이 재미지다. 특히 신라군은 백제군의 암호 같은 작전 용어 ‘거시기’를 해독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사실 ‘거시기’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표준말이다. 앞서 1977년에는 가수 혜은이가 제주도 사투리를 얹어 부른 <감수광>이 알쏭달쏭한 정취를 자아냈다. “감수광 감수광 난 어떡헐렘 감수광/ 설룬 사람 보냄시엔 가거들랑 혼저 옵서예~” 몇 년 전엔 티브이(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진한 경상도 방언 신드롬이 일기도 했다.

영화나 드라마, 문학 작품에서 방언(사투리)은 맛깔스런 사실감을 더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랫동안 사투리는 ‘방송심의규정’을 통과해야 했고, ‘사투리 쓰지 않기 운동’을 피해 음지에 머물러야 했다.” <방언의 발견>은 국어학자인 정승철 서울대 교수가 국가 표준어의 존속 이유를 비판적으로 되짚고 변방의 언어로 얕보인 방언의 의미와 가치를 복권시키는 책이다.

표준어/사투리의 구별(차별)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목되는 것은 전문 학술서와 대중 교양서의 미덕을 함께 갖춰 설득력과 흥미를 높이고 있어서다. 지은이는 우리말이 표음문자(한글)를 얻은 조선시대의 언문 기록을 뒤져가며 방언의 뿌리와 당대의 인식을 더듬고, 일제 강점기에 이식된 근대화 이후 방언이 2등 언어로 전락하는 과정과 시대적 배경을 풍부한 문헌 자료와 사례들을 들어 설명한다.

향토 말의 재발견과 보존 노력은 1992년 제주의 ‘사투리 말하기 대회’를 시작으로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고향말 경연’(명칭은 다양하다)로 확산되고 있다. 사진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과 지역 월간 <전라도닷컴>이 공동주최한 ‘2016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의 한 장면.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향토 말의 재발견과 보존 노력은 1992년 제주의 ‘사투리 말하기 대회’를 시작으로 여러 지방자치단체의 ‘고향말 경연’(명칭은 다양하다)로 확산되고 있다. 사진은 광주시립민속박물관과 지역 월간 <전라도닷컴>이 공동주최한 ‘2016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의 한 장면.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광주시립민속박물관과 지역 월간 <전라도닷컴>이 공동주최한 ‘2016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에서 ‘질로 존 상’(제일 좋은 상)을 수상한 참가자(오른쪽)가 사회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광주시립민속박물관과 지역 월간 <전라도닷컴>이 공동주최한 ‘2016 아름다운 전라도말 자랑대회’에서 ‘질로 존 상’(제일 좋은 상)을 수상한 참가자(오른쪽)가 사회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방언은 ‘오방지언’의 준말이다. ‘오방’이란 “동·서·남·북 사방에 중방(중앙)을 대등한 자격으로 합쳐 이르는 말”이다. “방언은 중앙-지방 또는 중심-주변의 이분법적 사고가 강력해지기 전부터” 독립적으로 쓰여왔다. 영조 때 한양 출신 관리 유의양이 당쟁에 휘말려 경남 남해를 비롯해 충청도와 함경도에서 1년 가까이 유배살이를 했다. 그가 남긴 <남해문견록>에는 현지 사투리에 차츰 익숙해진 경험담이 있다. “이런 방언이 처엄 들을 적은 귀에 서더니 오래 들으니 닉어가더라.”

18세기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렸다. “지방의 관리가 되어 사투리를 알면 그 지방 사정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처음 사근역(경남 함양군)에 부임했을 때 아전이나 종의 말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그들 또한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착오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얼마 지나 나도 사투리를 익혀서 드디어 백성을 대할 때 사투리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투리에 대한 편견이나 부정적 인식은커녕 목민관이 부임지 방언을 배워 소통했다는 이야기다.

동시대 전라도 장흥 출신 실학자 위백규는 후손들이 엮은 <존재집>에서 당시 언어 세태에 대한 기록과 함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보여준다. “요즘은 촌구석 사람 모두 한양 옷을 입고 한양 말을 쓸 수 있다. 이로써 비루하고 속된 풍속을 바꿀 수 있으니 기뻐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기뻐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는 바탕이 있은 뒤에야(…)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퇴옹(퇴계 이황)이 영남의 발음을 고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

지난해 전남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허벌나게(엄청나게) 재미있는 고흥설화 이야기 자랑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지난해 전남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허벌나게(엄청나게) 재미있는 고흥설화 이야기 자랑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지난해 전남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허벌나게(엄청나게) 재미있는 고흥설화 이야기 자랑대회’에서 방청객들이 참가자의 재담에 폭소를 터뜨리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지난해 전남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허벌나게(엄청나게) 재미있는 고흥설화 이야기 자랑대회’에서 방청객들이 참가자의 재담에 폭소를 터뜨리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하지만 20세기 들어 근대화 물결과 함께 방언은 시나브로 중앙과 대비되는 지방어(지역어)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표준어의 탄생’은 그 결정판이었다. 지은이는 “표준어는 19세기 제국주의·국가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잘라 말한다.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의사 전달 수단을 통일하여 국가적 역량을 결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타국에 대한 침탈을 도모하기 위해 제안됐다”는 것이다. 우리말에 ‘표준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일제 강점기 때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하면서 “현대 서울말을 표준으로 삼아”라는 규정을 명시했다. 지은이는 “(일제가) 조선 사회에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 개념을 새로 도입하고 이를 통치언어로 널리 보급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조선 표준어 정책은 일제의 복사판이었다. 일본 근대문학자인 고모리 요이치는 2004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일본어의 근대>에서, 표준어 ‘국어’는 국민 개인을 국가를 구성하는 전체 국민의 일부로 만들어 국민성(nationality)을 구성해내는 핵심이며, 국가권력과 결탁한 표준어의 발명은 근대 일본이 국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해나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짚었다.(<한겨레21> 493호)

지난해 전남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허벌나게(엄청나게) 재미있는 고흥설화 이야기 자랑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참가자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지난해 전남 고흥분청문화박물관에서 열린 ‘허벌나게(엄청나게) 재미있는 고흥설화 이야기 자랑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참가자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최성욱 <전라도닷컴> 기자 제공

국가의 언어통제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1960~70년대 전국의 ‘국민’학교(초등학교)에선 ‘고운말 쓰기 운동’이란 미명 아래 사투리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언어순화 운동’이 어른들의 새마을 운동과 짝을 이뤘다.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지역감정 극복을 내세워 표준어 사용 운동을 추진했다. 이듬해엔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현행 표준어 규정이 확립되면서, ‘방언=교양 없고 촌스러운 말’이란 인식을 굳혔다. 2006년엔 표준어 규정이 국민 평등권과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3년 뒤 헌법재판소는 이 청구를 기각했다. “표준어 규정은 표준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조항으로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법적 효과를 갖고 있지 아니하여(…) 기본권 침해의 가능성이나 위험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재판부는 그러나 표준어 규정의 범위를 “공문서 작성과 교과서 제작이라는 공적 언어생활의 최소한의 범위를 규율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지은이는 “말이란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것이며, 그러한 말을 ‘틀렸다’고 쓰지 못하게 하는 건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말한다. “지금 시점에서 표준어가 과연 국가 구성원 모두에게 필수적인지, 개인의 언어생활에 국가 표준어를 강제해도 되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라는 것. 표준어 교육에 익숙하고 그 필요성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이들에겐 당혹스러운 주장일 수 있겠다. 지은이의 생각은 명료하다. “‘틀린’ 말은 없다, ‘다른’ 말이 있을 뿐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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