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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뜬구름잡는 ‘아이티 동네’ 주유하다 ‘역사’로 되돌아왔죠”

등록 2018-05-09 18:54수정 2018-05-10 04:12

【짬】 ‘영추문 옆 역사책방’ 백영란 대표

역사 전문 서점 ‘영추문 옆 역사책방’ 백영란 대표.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역사 전문 서점 ‘영추문 옆 역사책방’ 백영란 대표. 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제가 주유(周遊)를 많이 했지요.” 주유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놀았다는 뜻이다.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까지 딴 뒤 미국에 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해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과 엔에이치엔(네이버)을 거쳐 2010년부터 엘지유플러스에서 일했다. 지난해 3월 퇴직한 엘지유플러스에선 부장급으로 입사한 지 2년 만에 상무로 승진을 했다. ‘사내 첫 사업 담당 여성 임원’이 된 그를 두고 언론은 ‘유리 천장을 깬 여성 직장인의 롤 모델’로 치켜세웠다.

지난 2일 경복궁 서쪽 통의동에 역사 전문 서점 ‘영추문 옆 역사책방’을 연 백영란씨 얘기다. 지난 8일 책방에서 그를 만났다.

직장 다닐 때 목표는 대표이사였다. 하지만 상무에서 더는 오르지 못했다. “잘린 거죠.” 그는 회사에서 전자결제 사업을 담당했다. “엘지유플러스의 간편결제 서비스인 ‘페이 나우’를 제가 만들었어요. 박근혜 정부가 (간편결제 서비스를 적극 추진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는 데도 기여를 했죠.” 예상보다 1~2년 일찍 회사를 나오게 됐지만 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단다. “회사 차원의 결정이죠.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전자결제 사업에 큰 역할을 못 하게 된 것은 아쉽죠. 이 사업이 잘나가는 일이라 많은 분이 하고 싶어 했거든요.”

퇴직 뒤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것도 스트레스를 줄였다. “스스로 책임지고 의사 결정을 하고 또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 답이 왜 역사책방이었을까? “아이티(IT) 쪽 일을 하다 보니 신기루만 쫓는 것 같았죠.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걸까요. 많은 걸 깨달으면서 예전에 좋아했던 역사 쪽으로 돌아왔죠. (서정주 시의) 거울 앞에 돌아온 누님처럼 방황하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입니다.”

한국사로 석사 뒤 미국서 경제학 박사
엘지유플러스 첫 사업 담당 여성 임원
“전자결제 서비스 사업 맡아 큰 보람”
지난해 상무 퇴직 뒤 서촌에 역사책방

“주목받지 못한 역사에 관심 가질 터”
새달 신병주 교수-류근 시인 대담도

‘영추문 옆 역사책방’ 내부 모습.
‘영추문 옆 역사책방’ 내부 모습.

그는 1983년 사학계열로 대학에 들어간 뒤 2학년 때 국사학과를 택했다. “중·고교 때 책을 많이 읽었어요. 민족주의 사고가 충만했었죠. 대학원에선 한국 재벌을 주제로 논문을 썼어요.” 초등 동창인 재미동포 남편과 결혼해 미국으로 간 뒤엔 주류 경제학을 전공해 박사를 땄다. “국사는 스토리텔링만 있는 것 같아 재미가 없었어요. 학문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세상을 보는 눈도 바뀌었다. “노동은 귀한 것이고 삶의 구원이라고 생각하다 인센티브를 활용해 사람이 일을 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다고 할까요.” 퇴직 한 달 전인 지난해 2월부터 사직단에서 창경궁까지 사대문 안을 두루 훑었단다. “역사 서점이라 사대문 안을 염두에 뒀어요. 지난해 9월 지금 자리를 찾았죠.” 개업할 때까지 대학 동기인 정치헌 대표의 도움이 컸단다. 정 대표는 제일기획 부사장을 지낸 최인아씨와 함께 재작년 서울 강남 지역에 책방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서점은 공간 비즈니스입니다. 최소 30평 이상은 돼야 해요. 지금 자리는 40평 이상이고 층고도 높아 공간 잠재성이 있다고 봤죠.” 월세는 350만원이다. 알바 직원도 1명 둘 생각이다. 책방엔 카페 공간이 따로 있다. “적자를 면하는 게 목표이고 희망은 용돈 정도 버는 겁니다. 회사에서 번 돈으로 차렸어요. 남편도 교직에 있어 돈이 많지 않아요.”

문을 열고 일주일이 지났다. “요즘 ‘조바심을 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주변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참 많이 주십니다. 하지만 돈벌이가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해요. 균형을 잡는 게 중요하겠죠.”

‘영추문 옆 역사책방’ 안 카페 공간.
‘영추문 옆 역사책방’ 안 카페 공간.
책방의 주인공은 역시 책이다. “1년 동안 지인들 상대로 갖춰야 할 역사책 목록을 모았어요. 5천권 정도 됩니다. 이 가운데 2800권 정도가 매장에 들어왔어요.” 새 책과 주요 역사 위주인 대형 서점과 달리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했던 역사를 다룬 책을 많이 모았단다. 실크로드 유목민의 역사가 그런 예이다. 며칠 새 이 분야 책이 많이 팔렸다고도 했다.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지만 가능성이 있는 역사이죠. 북한 문제가 해결되면 유목민이 살았던 유라시아 지역이 우리가 살 길이거든요.” 이런 말도 했다. “역사는 품이 넓어요. 모든 학문은 다 역사가 있죠. 심지어 아이티(IT)도요.”

다음달엔 강연 행사도 열려고 한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와 류근 시인이 조선사를 주제로 대담을 하고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저자인 배기찬씨가 북한 개발 프로젝트를 주제로 강연하고 토론도 할 계획이다.

역사책방의 중앙아시아사 서가 모습. 아래 빈 공간의 책들은 벌써 새 주인을 찾아 책방을 떠났단다.
역사책방의 중앙아시아사 서가 모습. 아래 빈 공간의 책들은 벌써 새 주인을 찾아 책방을 떠났단다.
“아이티 쪽 일을 하면서 역사책은 거의 읽지 않았어요. 온라인에 올라오는 최신 아이티 정보를 읽느라 바빴죠. 서점을 연 뒤에도 책 읽을 시간을 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마지막 질문은 ‘지금 회사는 여성을 동등하게 대하는가’다. “여자 시각에선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회사란 조직이 여자를 일부러 불평등하게 대한다고 보진 않아요. 다만 회사가 지금껏 굴러온 방식에 남자가 더 잘 맞는 것이죠. 회사의 위계질서 안에서 체계적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여자가 다녀온 남자에 비해 조직문화에 최적화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구조인 거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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