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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노동 선진국’ 환상 깬 현장 르포

등록 2018-05-17 19:35수정 2018-05-17 19:44

버려진 노동
귄터 발라프 지음, 이승희 옮김/나눔의집·1만5000원

이 책은 ‘선진국’에 대한 환상을 부순다. 노동의 위기로부터 지구촌 어디든 안전한 곳은 없다는 각성이 찾아온다. 판타지가 사라지고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 깨달음이 온다. ‘그래서 연대가 필요하다.’

이 책은 독일의 ‘위장 전문기자’이자 시민운동단체 ‘워크워치’ 설립자인 귄터 발라프가 동료 언론인·활동가들과 함께 아마존 물류센터, 택배업체, 쇼핑몰 업체 배송센터, 인도의 독일 자동차 하도급 공장, 메르세데스 벤츠, 프랜차이즈 노인요양업체 등에 몇달 동안 잠입취재해 작성한 르포 모음이다. 책에 묘사된 현실은, 모범적 노사관계 국가라고 알려진 독일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다. 노동자들은 정직원(1계급), 파견직원(2계급), 도급계약직원(3계급)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 당한다. 계급이 낮을수록 더 싸고 더 자르기 쉽기 때문에, 경영진은 1계급을 줄이고 2·3계급을 늘리려 온갖 묘수를 짜낸다. 하위 계급 노동자들은 곧바로 착취의 희생자가 된다. 당연히, 그 결과는 소득 불평등의 심화.

주문 받은 물건을 창고에서 꺼내는 업무를 맡은 아마존 물류센터의 ‘피커’ 마틴을 보자. 마틴은 오전 6시 출근을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난다. 출근도장을 1분 늦게 찍으면 15분이 날아가는데, 출근도장을 찍기 전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까다로운 검색대를 통과해 자신의 핸드스캐너를 챙겨야만 한다(노동자들이 몇달이나 싸워서야 검색대 통과로 출근도장을 대신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서로의 실수와 오류를 매니저에게 보고하는 감시체제에 놓여 있다. 기간제 노동자들의 경우 계약기간 마지막 날에 고용 연장 여부를 통지받는데, 해고를 통보받으면 즉시 착용하고 있던 작업복·작업화를 반납해야 한다. 사물함이 워낙 작아 작업화를 그냥 신고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에 해고 당일 노동자들은 당장 신고 갈 신발이 없어 맨발로 상점 앞에 늘어서 신발을 고른다.

‘내부 고발자’에 대한 복수도 철저하다. 독일 온라인 패션쇼핑몰 잘란도에서 일하던 노동자 다니엘은 방송 인터뷰에서 “물마실 시간도 없고 착석을 허락하지 않는” 노동 조건을 비판했다. 이튿날 아침 다니엘이 검색대에 서자 그의 출근카드가 인식되지 않았다. 다니엘이 부당 계약해지 소송을 제기하자 회사는 돈으로 회유해 비밀유지 각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민자들의 삶은 100년 전 쓰인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에서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 일대에서 잘나가는 돼지축산회사 퇴니스는 전체 직원 중 3분의 2를 하청업체 노동자들로 채우는데, 하청업체들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인력을 모집한다. 남편과 본인의 실직으로 생계가 막막했던 불가리아 여성 카티야는 폴란드어로 쓰인 두툼한 계약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서명을 하고 독일로 왔다. 도축장에 투입된 그는 시간당 4유로씩 받으며 하루 10~14시간씩 최소한 일주일에 5일 동안 일했다. 점심시간이 30분 주어졌으나 식당 줄이 너무 길어 카티야는 한 끼니도 먹지 못하고 일할 때가 많았다. 결국 카티야는 작업장에서 일하다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고 해고됐다.

그러나 필자들은 희망의 증거들을 제시하며 ‘내일’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쥐가 나올 만큼 열악한 일터에서 형편없는 돈을 받고 일했던 슈퍼마켓 체인점 에데카 노동자들이 언론과 시민들을 상대로 노조 지지운동을 벌여 가맹점을 직영매장으로 전환하게 하고 처우를 개선시킨 것이 한 사례다. 책장을 덮으면 “국가, 정당, 입장의 경계를 넘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귄터 발라프의 말이 귓전을 울린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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