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전파담-외국어는 어디에서 어디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졌는가
로버트 파우저 지음/혜화1117·2만원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아 일을 하다보면, 분야를 막론하고 ‘내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면’ 하는 생각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꼭 영어가 아니어도 사용인구가 많고 한 개 이상의 대륙에서 사용하는 언어 구사자라면, 태어난 곳이 ‘헬’이어도 탈출버튼을 누르기가 쉬울 테니까. 하지만 한국어 사용자는 외국어를 익히지 않고는 다른 나라에서 일을 찾기가 힘들다. 아니, 한국에서 취직을 하려면 (실무에 영어능력은 전혀 필요치 않은 경우에조차) 영어는 필수다. 조기유학의 성과에 대해 말이 많지만 최소한 ‘영어 공포증’을 없앨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큼은 널리 인정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개강> 1899년 잡지 <퍽>(Puck)에 실린, 미국의 해외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정치 풍자 만화. 미국인이 점령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장면을 희화화했다. 미국 국회도서관 소장
로버트 파우저의 <외국어 전파담>은 부제가 잘 설명하듯 “외국어는 어디에서 어디로,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졌는가”를 다룬다. 350쪽에 이르는 이 책은 한국어로 쓰였는데, 저자 소개 첫 문장이 이렇다. “그는 각국 도시 생활자다.” 미국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배웠고, 한국어를 배웠고, 라틴어와 북미 선주민 언어 문법을 배웠고,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독일어를 배웠고, 맹자를 읽으며 한문을 배웠고, 시조를 읽으며 중세 한국어를 배웠고, 일본에 살면서는 몽골어를 배웠다는 식이다. <외국어 전파담>의 서문은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되어 있고,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이 책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쓰였다. 이쯤 되면 저자에게 뭔가 특별한 외국어 공부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하지만 이 책의 주요 관심사는 인류의 외국어 학습사와 전파사다. 인간이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는 다른 언어를 접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중요한 이유는 학문을 위해, 즉 문헌을 읽기 위해서였다. 외국어 구사에서 말보다 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것. 언어의 이동에서 종교의 역할도 흥미롭다. 종교 전파를 위해 선교사들은 자신의 언어를 가르치기보다 현지어를 배우는 데 열심이었다. 선교사들은 다른 나라로 선교를 위해 떠나며 자신이 새로 배운 언어와 문화와 동행했다. 나아가 그들은 본국으로 돌아간 뒤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20세기 초 한국의 한 학교의 수업 시간, 교사가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고 있다. 이 당시 학교 교육을 받았던 이들은 한글과 한자는 물론 일본어와 영어, 또다른 외국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다언어 세대였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도서관 코윈&넬리 테일러 컬렉션 소장
언어가 공격적으로 국경을 넘은 계기는 전쟁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 각국은 먼저 ‘국어’를 정하고 보급했다.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강대국의 언어는 바다와 대륙을 건넜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제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던 일을 떠올려보라. 종교 전파를 위해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배웠다면, 제국의 지배를 위해서는 제국의 언어를 전파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언어를 가르치는 국제기관을 설립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 뒤 그 언어를 식민지 국가의 공식 언어로 사용하게 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영어는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이른바 ‘영어권’ 국가 외에도 약 55개국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프랑스어 역시 약 29개국에서 공용어로 지정되었는데, 그 중 약 21개국이 아프리카에 몰려 있다는 사실 역시 프랑스어 보급이 식민지배의 역사와 관련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은 뒷부분으로 가면서 외국어 학습방법의 역사를 다룬다. 숱하게 탄생하고 사라진 외국어 교수법은 결국 말하기의 효율적 교육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철학과 문학의 중요한 텍스트를 교양 차원에서 읽을 수 있게 하는 독해 중심 교육에서 출발, 글이 아닌 말이 외국어 교육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데 이르렀다. 그리고 20세기부터 모든 길은 영어로 통하게 되었다.
190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선주민 학교인 카를리슬 선주민 스쿨에서 이뤄진 영어 수업 장면. 흑인 노예들에게는 철저하게 금지된 영어 학습이 이들에게는 거의 강제적으로 이뤄졌다. 미국 국회도서관 소장
지은이는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세계공용어로서의 영어가 점유한 지위를 중국어에 내어줄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곤,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 예측한다. 영어는 전세계 인적 교류의 현장에서 ‘기본 운영 체제’ 역할을 맡았다는 게 그 이유다. 또한 그는 21세기 후반에는 모어와 외국어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모어와 제2언어, 제3언어라는 식의 분류가 일상화되리라 예측한다. 게다가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은 외국어 구사 능력이 특권이던 시절에 이별을 고하게 되리라. 하지만 인공지능이 평화와 화해를 만들어줄 순 없다. 지난 수세기 외국어를 통해 누려온 기득권의 재생산을 해체하는 데는 만국공통어를 만들거나 모든 언어에 능통할 일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타자를 보는 시선을 성숙시켜야 할 일이다. 그 고민은 학습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다혜 작가, 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