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한겨레출판·1만1000원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한국에도 비교적 알려진 작가다.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한 그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로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했으며, 뒤늦게 배운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성인이 된 뒤 새로 익힌 언어로 작품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조지프 콘래드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들과 같은 계보에 속한다. 그의 짧은 책 <문맹>은 헝가리어라는 양수에서 평화롭게 헤엄치던 그가 망명이라는 고통스러운 산도(産道)를 통과해 프랑스어 작가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쓴 자전적 기록이다. “나는 다시 문맹이 되었다. 네 살부터 읽을 줄 알았던 내가 말이다.” 정치적 이유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남편을 좇아 4개월짜리 딸을 데리고 국경을 넘은 그는 낯선 땅에서 말과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했다. 네 살부터 읽을 줄 알았고, 어린 나이에 할머니와 동생 등 가족에게 이야기를 꾸며 들려주었으며, 기숙 학교에 다니면서는 짧은 연극 대본을 써서 공연에 올렸고, 비밀 노트에 시와 산문을 썼던 그가 말이다. “나는 다른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인간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망명 이후 그는 낯설고 생경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보이는 언어와 화해하거나 ‘정복’하기 위한 싸움에 임해야 한다. 같은 문맹이라도, 어린아이가 백지 상태에서 최초의 언어를 배우는 것과 이미 한 언어를 익힌 어른이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두번째 문맹은 첫 언어를 억제하고 망각하는 투쟁을 수반한다.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그는 새로 익힌 언어 프랑스어를 “적의 언어”라 부른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에 도착하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은 거의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생존에 필요한 말을 알아듣고 떠듬떠듬 신문 기사를 뜯어 읽기에도 벅찬 처지에 창조적인 글을 쓰기란 무망한 노릇이었을 터.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문맹 상태를 벗어나자 쓰고 싶다는 욕망을 더는 누를 수가 없게 된다. 희곡을 써서 동네 식당 무대에 올리고 라디오 방송극 작가가 된 뒤,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한 짧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쓴 글을 파리의 3대 출판사에 보내고, 두 출판사의 거절 편지를 받은 뒤 마침내 세번째 출판사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듣는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문맹>을 번역한 이는 젊은 소설가 백수린이다.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왔으며 초기 단편들에서 외국어의 섬에 던져진 인물들의 언어를 둘러싼 갈등을 즐겨 그린 이여서 이 책 번역자로서 맞춤하다 싶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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