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민정 지음/현실문화연구·1만6000원 1933년 11월22일, “신의주착 (중국) 북행 열차의 침대(칸)”에서 젊은 여성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18세의 꽃같은 처녀가 잠들어잇는데 어떤 자가 자기의 결박한 입술에 키스를 하는 자가 잇으므로 놀래깨어 소리를 질럿다”는 것. 현장에서 이동경찰에 체포된 범인은 여행 중이던 19살 일본 청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범죄는 신문에 날 만큼 새로운 사건이었다. 이틀 뒤 <동아일보>가 ‘괴(怪)! 침대차에서 키스를 절취’…변태성범인 현장피착(被捉)’이란 제목으로 전한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다. “색다른 이야기치고는 너무 악취미가 농후한 ‘에로토마니아(色狂)’의 이야기.” 1920~30년대 조선은 일제 침탈로 왕조국가가 무너지고 ‘근대’가 이식된 식민통치 시대였지만, 동시에 성(性)에 대한 관심과 담론이 폭발적으로 분출한 시기이기도 했다. 여성학자 박차민정이 쓴 <조선의 퀴어>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위에 선 다양한 성적 실천이 ‘변태성욕’이란 말로 뭉뚱그려졌던 시공간을 ‘섹슈얼리티의 역사’라는 관점으로 분석한 조선판 ‘성의 역사’다. 일제 식민지 시기의 여성담론과 젠더, 성 보건, 동성애 등에 관한 연구 저술이 처음은 아니다. 이 책의 미덕은 여성주의 및 탈식민주의 관점과 퀴어(성 소수자)이론이라는 베틀 위에 100년 전 신문·잡지에 나오는 생생한 문헌 자료들을 실타래 삼아, 우리의 ‘근대’에 대한 한층 풍부하고 입체적인 이해를 직조해 낸다는 것. 지은이가 주목한 1920~30년대 당대의 성과학 지식이 ‘변태 붐’이란 열쇳말과 함께 신문지상에 오르내렸고, ‘에로 그로 넌센스’란 유행어가 풍미했다. “‘에로 그로 넌센스’는 에로틱(성애), 그로테스크(기괴함), 넌센스’의 줄임말로, 일본의 모더니즘 시대와 파시즘 시대 사이에 존재한 데카당트한 사조”를 뜻한다. 여성의 묘를 파고 수의를 훔친 ‘변태성욕자’의 알고 보면 딱한 사연, 고대 그리스·로마의 ‘남색’ 문화를 연상케 하는 성인 남성과 미소년의 ‘수동무’ 결합, “24살까지 ‘계집 노릇’을 해오다 “진정한 성별이 남성에 가까운 ‘반음양’이란 진단을 받고 성전환 수술로 훌륭하게 남자가 된” 일본인 이야기, 남장 행색으로 공고한 성별 특권의 경계를 넘으려던 ‘신여성’들, 여류 명사들의 동성연애기 등 당대의 사회문화상이 생생하다. “(일제)식민지 당국은 조선인들을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본국’ 일본에 비해 더욱 가부장적으로 조선인의 성을 통제”한 현실도 엄연했다. 지은이는 이 모든 사례들을 당당하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고 실천하는 ‘근대적 개인’의 출현으로 해석하는 한편, ‘신체’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관리에도 주목한다. “이 책이 소개할 퀴어한 존재들, 기이함과 낯섦을 통해 발견되는 과거가 현재의 규범들 역시 낯설게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서문)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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