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공식 걸그룹 ‘김시스터즈’가 196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하는 모습. 안나푸르나 제공
걸그룹이 넘쳐나는 시대다. 트와이스, 레드벨벳 등 인기 걸그룹 노래들이 어디서든 흘러나오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낯선 이름의 신인 걸그룹들이 쏟아진다. 이렇게 되기까지 초석을 다진 이들로 젊은 세대는 흔히 1997년 데뷔한 에스이에스(S.E.S.)와 1998년 데뷔한 핑클을 꼽는다. 이른바 ‘걸그룹의 조상’이다.
하지만 걸그룹의 진짜 조상은 따로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83년 전에 이미 활동했던 ‘저고리시스터’를 비롯해 이전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던 걸그룹들이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다.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가 그들의 발자취를 모아 써낸 책 <걸그룹의 조상들>(안나푸르나 펴냄·3만원)이 최근 출간됐다.
이 책은 1935년부터 1999년까지 등장한 한국 걸그룹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글쓴이는 어린 시절부터 수집한 앨범, 잡지, 사진, 광고 등 방대한 자료와 매체 인터뷰 등을 통해 300여팀의 존재와 역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했다. 2012년 걸그룹 자료 전시회를 처음 연 이후 꾸준히 한국 걸그룹의 뿌리를 좇아 이번에 결실을 이뤘다. 책 출간과 함께 27일까지 서울 롯데갤러리 영등포점에서 ‘걸그룹의 조상들’ 전시회도 하고 있다.
최 대표는 “한국 걸그룹 역사의 원년은 저고리시스터가 소속된 조선악극단이 등장한 1935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에도 여성들로만 구성된 합창단, 악극단 등이 있었지만, 저고리시스터야말로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팀이라는 것이다. 저고리시스터는 일제강점기 오케레코드에서 운영한 조선악극단 소속 여가수들로 구성됐으며, 주로 5~6인조로 공연 활동을 벌인 프로젝트 걸그룹의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참여 멤버 중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이 눈에 띈다.
한국 걸그룹 역사에서 최초로 공식 이름을 지닌 ‘저고리시스터’ 멤버들. 왼쪽부터 홍청자, 왕숙랑, 박향림, 이난영, 서봉희, 김능자, 장세정, 이화자. 안나푸르나 제공
하지만 이들의 공식 음반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세월이 더 흘러 1950년대에 데뷔한 ‘김시스터즈’를 한국 최초의 ‘공식’ 걸그룹으로 보는 이유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의 두 딸과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의 딸로 이뤄진 3인조 걸그룹이다. 주한미군부대 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은 데 힘입어 1959년 정식 계약을 맺고 미국에도 진출했다. 2009년 미국에 진출한 원더걸스보다 50년 앞선 시점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는 이시스터즈, 아리랑시스터즈, 펄시스터즈 등 수많은 ‘시스터즈’들이 쏟아져 나왔다.
196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로 큰 사랑을 받은 ‘이시스터즈’ 멤버들. 왼쪽부터 김천숙, 이정자, 김명자. 안나푸르나 제공
걸그룹은 성을 대상화한다는 비판도 받아왔다. 해방 전후 ‘기생’들이 걸그룹 활동의 모태가 되기도 했고, 동양 여성이라는 신비감 때문에 외국에서 더 주목받은 측면도 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사회는 짐짓 외면하면서도 뒤로는 은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고 글쓴이는 지적한다. 최 대표는 “어쩌면 걸그룹의 역사는 편견과의 싸움이기도 하다”며 “지난 시대 걸그룹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즐거움과 함께 모순과 편견의 시대에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겪어야 했던 삶의 부침도 담았다”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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