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45분 기준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예매량은 105만장으로 개봉하기도 전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영화는 전체 영화관 상영관 점유율이 75%에 이르렀다. 개봉 첫날인 25일 오후 서울 시내의 한 영화관에서 관람객들이 예매 티켓을 출력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에는 온갖 유행이 있다. 한껏 부풀린 어깨, 헐렁헐렁 통 큰 바지가 유행했던 오래전 내 사진을 지금 보면 참 우스워 보인다. 그런데 그때는 어느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옷차림이 다음에 유행할지는 미리 알기 어렵다. 많은 사람이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옷을 입는다는 것이 유행의 이유라면 이유다. 전염병도 마찬가지다. 쉽게 전염되는 새로운 병원균이 등장하면, 병에 걸린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바로 그 이유로 다음날에는 더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다. 음악이나 영화의 유행도 비슷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새로 나온 멋진 노래를 들어본 사람은, 마치 병원균에 전염된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리저리 자기 주변의 사람에게 막 발견한 이 멋진 노래를 추천한다. 추천받은 사람이 들어보고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이 노래를 주변에 추천하는 연쇄반응이 시작되면, 이 노래는 점점 퍼져 음악시장 상위에 랭크된다. 통계물리학에서는 전파되는 것이 무엇이더라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 패턴을 이해하려 한다.
우리나라의 영화진흥위원회 누리집(www.kobis.or.kr)에는 국내 개봉된 영화 각각의 관객 수가 하루하루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데이터가 모두 공개되어 있다. 전체 관객 수가 100명이 넘은 6495편의 영화 데이터를 모아 우리 연구실의 이대경, 이송섭 연구원과 함께 분석했다. 전체 2만 편이 넘는 많은 영화가 개봉했는데, 전체의 70%에 해당하는 1만4000편 가량의 영화들은 관객 수가 100명도 채 안 된다. 큰 성공을 거둔 영화를 적어보면, <명량>(1760만), <신과 함께-죄와 벌>(1440만), <베테랑>(1340만), <아바타>(1320만), <도둑들>(1300만), <7번방의 선물>(1280만), <암살>(1270만), <광해-왕이 된 남자>(1230만), <택시운전사>(1210만), <변호인>(1140만)의 순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영화시장은 엄청난 빈익빈 부익부의 특성을 보여준다. 1등 영화에 국내 인구 수의 3분의 1에 이르는 관객이 몰리는 데 비해, 상위 30% 정도 순위의 영화라도 기껏 100명만 봤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영화의 관객 수 분포를 그려보면, 사람들의 소득 분포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 많은 사람이 들어봤을 80-20 법칙이 바로 이런 분포의 한 예다. 예를 들어, 한 백화점의 매출 중 80%가 20%의 고객에 의해 발생한다거나, 한 대학의 논문 중 80%는 20%의 교수가 출판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사실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영화의 관객 수를 가지고 마찬가지 계산을 해보면, 80-20 법칙보다도 더 기울어진 꼴이어서 90-10 법칙을 따른다. 즉, 상위 10%의 영화가 수익의 90%를 차지한다. 다른 계산도 해보았다. 소득의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인 지니계수다. 완전 평등의 경우에 0의 값을 갖는 지니계수는 불평등의 정도가 심할수록 값이 커지는데, 우리나라의 소득 지니계수는 0.3 정도다. 내려받은 자료로 영화시장의 지니계수를 구해보니 0.9다. 영화의 수익구조는 불평등의 정도가 심한 우리나라의 소득구조보다도 훨씬 더 불평등하다는 뜻이다. 2000년 통계조사로부터 김, 이, 박 등의 성씨 분포의 지니계수를 구해보기도 했는데, 그 값이 또 0.9다. 김, 이, 박, 최만 모아도 전체 인구의 절반이 되는 것처럼, 극소수의 영화가 시장 대부분을 독식한다.
영화나 옷차림이나 음악이나 전염병이나, 한 사람이 주변에 영향을 미쳐서 하루에 한 명의 친구가 같은 행동을 따라 한다고 가정해보자. 첫날 영화를 본 사람이 10명이면, 이들의 추천에 설득돼 이튿날 영화를 본 관객이 10명 더해져 누적관객은 20명이 된다. 이제 이들 20명은 각각 또 주변의 친구 한명씩에게 영화를 ‘감염’시킨다. 사흘째 40명, 나흘째 80명으로 늘어난다. 하루에 꼭 두 배가 될 리는 없다. 하지만, 내가 매일 영화 추천을 계속하고, 내 말 듣고 하루 동안 영화에 ‘감염’되는 친구 수의 기댓값이 0만 아니라면, 누적관객은 초기에 기하급수적으로(즉, 지수함수를 따라) 늘어나야 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큰 문제가 된 메르스 사태 때 일일 환자 수는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초기 감염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계산해보니 1명의 환자가 하루에 감염시킨 환자 수의 평균은 0.25명 정도였다. 0.25가 작은 수가 아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누적환자 수가 하루 전 환자 수의 1.25배가 된다는 얘기여서 일주일이 지나면 환자 수는 무려 아홉 배가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 보건 당국의 노력과 감염되지 않으려 조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전염병의 전파는 결국 멈춘다.
<그림 1>에서 과거 메르스 누적환자 수와 상위 10개 영화의 누적관객 수를 함께 그려보았다. 둘은 상당히 다른 패턴을 보여준다. 전염으로 퍼진 메르스는 기하급수적인 초기 증가를 보여주는 데 비해, 영화는 초기의 증가가 기하급수적이지 않고 거의 직선의 꼴을 따른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는 ‘전염’으로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직선 꼴을 따른 초기의 관객 수 증가를 설명하는 한 가지 가능성은 바로 ‘광고’ 효과다. 모든 사람이 친구로부터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광고의 영향으로 영화관에 간다면, 어제의 누적관객 수가 오늘 관객 수에 영향을 미칠 리 없고, 이 경우 누적관객은 처음에 직선 꼴로 늘어난다는 것을 쉽게 보일 수 있다. (관심 있는 사람은 미분방정식 dN/dt = a(1-N/K)을 의미를 생각하며 풀어볼 것. 영화가 병원균처럼 ‘전염’으로 유행한다면 dN/dt = rN(1-N/K)의 꼴로 어림할 수 있다. 각각을 풀어 <그림 1>의 두 그래프와 비교해보시길.)
그림 1. 우리나라 흥행 상위 10편 영화의 누적관객 수와 메르스 발생 후 누적환자 수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초기의 그래프의 모습이 달라서 메르스의 경우에는 지수함수적인 증가를, 영화의 경우는 직선을 따른 증가를 보여준다. 김범준 제공
다른 점은 또 있다. 전염병의 경우 병원균이 전파되면서 하루에 발생하는 신규 환자 수는 늘어나다가 어떤 최대값을 지난 후에는 다시 감소하는 패턴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하루 관객 수는 개봉 초기 큰 값에서 시작해 꾸준히 계속 감소하기만 한다. <그림 2>가 바로 이 그래프다. 일일 시장점유율을 최상위 영화 10개에 대해 평균을 내 그린 그래프다. 우리나라에서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하루 관객 수는 개봉일 이후 계속 줄어든다. 이것도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의 성공이 사람들 사이의 ‘전염’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위의 두 미분방정식의 해를 구하고 dN/dt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차이를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영화 시장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좋은 영화라고 주변에 추천하는 과정의 연쇄반응에 의해 성공이 결정되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림 2>에서 영화 하루 관객 수의 반감기도 구해보았다. 우리나라 흥행 상위 영화의 반감기는 약 19일이다. 평균적으로 19일이 지나면 하루 관객 수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림 2>를 보면, 흥행 최상위 영화 1편의 개봉초기 시장 점유율은 60% 정도다. 상당히 큰 값이다.
그림 2. <그림 > 흥행 상위 10개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개봉일 후 계속 감소하는 꼴이다. 점유율이 절반이 되는 반감기는 약 19일이다. 김범준 제공
건강한 생태계가 유지되려면 종 다양성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 생태학의 상식이다. 환경오염이 극심한 하천 생태계에서 각 생물종이 얼마나 많이 발견되는지를 분석하면, 우리나라 영화시장과 같은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볼 수 있다. 끔찍할 정도로 오염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물종은 엄청난 개체 수를 보여주지만, 오염을 버틸 수 없는 대부분의 여러 생물종의 개체 수는 아주 작다. 우리나라의 영화시장은 여러모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극소수의 대박 영화가 시장의 대부분을 독식한다는 점에서, 또,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영화 흥행의 성공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렇다. 개봉 첫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영화를 봤는지가 최종 흥행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형태다. 이런 이유로, 거대 자본이 투입된 영화는 개봉 초기 많은 스크린을 독점하려 하고, 또 엄청난 광고 예산도 투입된다. 영화 보러 극장에 간 날,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새벽에 딱 한번 상영하는데, 대부분의 상영관에서는 하루 종일 딱 하나의 영화만 보여주는 것은 영화계뿐 아니라 영화 관객에게도 불공평한 일이다. 과도한 스크린 독점을 규제하는 것은 꼭 필요해 보인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다양성이 함께하는 건강한 영화 생태계를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나부터도 현란한 광고보다는 친구의 진솔한 영화평에 귀를 더 기울여야겠다. 거대 자본을 동원한 마케팅이 아니라 영화를 본 이들의 입소문으로 성공이 결정되는 영화 시장이 더 건강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