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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탁구왕’ 동독 소년의 ‘분단과 통일’ 체험기

등록 2018-06-07 19:53수정 2018-06-07 20:44

어쨌거나 핑퐁-베를린 장벽이 열린 날
마빌 글·그림, 윤혜정 옮김/돌베개·2만원

전쟁이 나고 대통령이 죽고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겨도 아이들은 어쨌거나 태어난다. 정권이 바뀌고 체제가 변하고, 온사회가 휘청이는 정치적 격변기에도 아이들은 어쨌거나 자란다. 전쟁과 분단 등 험난한 시기에도 들꽃처럼 자라난 한반도 아이들처럼 독일 역시 그랬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그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화 <어쨌거나 핑퐁>은 1976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통일을 목도한 만화작가 마빌이 2014년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기념해 펴낸 책이다. 같은해 독일 최고의 만화가상인 ‘막스와 모리츠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주인공 미르코 바츠케는 예습이 취미이고 피아노 연습도 빼먹지 않는 모범생이다. 몸집이 작고 겁이 많은데다 운동신경도 둔해 덩치 큰 고학년에게 시달리기 일쑤이지만, 그에게도 놀라운 ‘스포츠 재능’이 있었으니 바로 탁구. 미르코는 탁구를 치며 삐딱한 말썽꾸러기 동급생 토르스텐 마슬로프스키와 우정을 쌓고, 자신을 괴롭히는 고학년 불량배들과도 맞짱을 뜬다. 어리버리하면서도 할 말은 정확하게 하는 미르코, 허세 부리는 토르스텐, 똑부러지는 성격의 같은 반 여자친구 메히틸드, 훈계를 늘어놓길 좋아하는 학급회장 앙겔라 등이 등장해 유쾌한 명랑만화의 줄거리를 이어간다.

<어쨌거나 핑퐁-베를린 장벽이 열린 날>의 한장면. 돌베개 제공
<어쨌거나 핑퐁-베를린 장벽이 열린 날>의 한장면. 돌베개 제공

작가는 아이들의 성장담에 장벽이 무너지기 전 뿌리부터 흔들리는 동독 사회의 모습을 촘촘히 새겨놓았다. 소년단의 깃발과 빨간 스카프는 건재한 듯 보이지만 동베를린의 거리는 소박하다기엔 초라하다. 부족한 물자 탓에 새 탁구 라켓을 구하려 재활용품 수집을 시도하지만 이 역시 어렵다. 장벽 너머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이웃들이 늘어가고 미르코의 부모님도 ‘도망’을 꿈꾼다. 투철한 공산주의자로 보였던 소년단 지도원 교사인 크란츠 선생님마저도 집에선 서독 잡지 <슈피겔>을 숨겨놓고 본다. 수학여행에 간 아이들은 영국 밴드 디페시 모드의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죽여준다”고 감탄한다.

탁구는 동독인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아이들의 순수한 에너지를 상징하는 한편, 앞으로 동독 사람들이 겪게 될 소외도 암시한다. 아이들은 소년단 창단 기념일에 모두가 원하는 대로 탁구대회를 열자고 하지만, 크란츠 선생님은 행사 취지에 맞지 않다며 반대한다. 결국 크란츠 선생님이 없는 틈을 타 아이들은 교내 탁구대회를 기획하고 미르코가 총괄을 맡았는데, 하필 대회가 열리는 날 장벽이 무너진다. 미르코는 서독 땅을 밟아보자며 팔을 비트는 부모님에게 떠밀려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고, 대회는 결국 무산된다. 서독을 찾은 동독 주민들에게 방문 경비로 1인당 100마르크씩 주는 ‘관대한 정책’에 따라 돈을 받아쥔 미르코는 없는 것 없는 서독 마트의 화려함에 놀라다가, 최신 탁구 라켓이 즐비한 매장을 보며 끝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작가는 서독 주민들을 친절하게 묘사하면서도, 미르코 가족을 보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는 서독 소녀의 찡그린 표정을 통해 향후 벌어질 동·서독 주민간 갈등을 예고한다.

국경이 열린 날 밤, 이웃 아저씨는 ‘또다른 사고’를 친 토르스텐과 미르코에게 “이제 너희는 더이상 애들이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어느날 갑자기 장벽이 무너진 것처럼 소년기의 문도 급작스레 쾅 닫힐지 모른다. 그러나 뭐 어때. 미르코와 친구들은 이튿날도 탁구를 미친 듯 쳐댈 텐데. 어쨌거나 핑퐁.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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