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33번지 유곽 주인 ‘연심’의 날개는 무엇?

등록 2018-06-14 19:36수정 2018-06-14 19:59

후배들이 이어쓴 이상 소설 ‘날개’
‘대산문화’ 특집에 여섯 작가 참여
연심의 관점 취한 여성주의 두드러져

대산문화 2018년 여름호
이승우·강영숙·김태용 외 지음/대산문화재단·6000원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의 소설 ‘날개’의 마지막이다. 그가 죽기 한 해 전인 1936년에 발표한 작품. 주인공 ‘나’가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 정오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겨드랑이의 날개 자국을 의식하는 장면으로, 비상(飛上)과 추락의 예감이 혼재되어 복합적인 울림을 자아낸다.

자국뿐인 날개를 믿고 ‘나’가 백화점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면, 그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상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뒷이야기를 후배 작가들이 상상해 보았다. 계간지 <대산문화>가 기획한 특집 ‘이상 소설 ‘날개’ 이어쓰기’에 참여한 이승우·강영숙·최제훈·김태용·임현·박솔뫼 등 현역 소설가 여섯이 그들. 각자의 개성과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나’의 아내인 연심의 관점에서 사태를 관찰하고 해석한 여성주의적 관점이 두드러진다.

“생활을 놓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타령을 하며 빈궁 연구에 골몰하느라 나를 뭇 사내의 바지 주머니나 노리는 첨단의 악처로 만든 지금의 남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진명여고보를 무사히 졸업한 뒤 오피스걸이 되어 저 차에 타고 있거나, 책을 옆에 끼고 이화여전 가사과(家事科)쯤은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승우 소설 ‘사이렌이 울릴 때’의 삽화.
이승우 소설 ‘사이렌이 울릴 때’의 삽화.

김태용의 ‘우리들은 마음대로’에서 연심은 “물어뜯어도 시원찮을 의뭉스러운 쭉정이” 같은 남편 때문에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고 여긴다. 낮에는 거리를 활보하며 자유를 만끽하고 밤이면 집으로 찾아오는 사내들을 맞이하는 것이 정해진 일상. 그러던 어느 날 미쓰코시 백화점 앞을 지나던 중 백화점 옥상에서 투신한 사내의 주검을 목격한다. “산란한 봉두난발과 칼면도가 필요한 도둑 수염의 사내”는 다름 아니라 쭉정이 같은 남편.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성역 티룸에 간 연심은 우연찮게 여배우 문예봉을 만나 같이 함흥행 기차를 타기로 모의한다. 원작 ‘날개’의 결말을 비튼 이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일어나자. 가자. 나는, 우리들은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임현의 ‘진술에 따르면’에서 사내의 투신 사건을 수사하는 경시청 경부를 만난 연심은 “아무래도 내가… 그 사람을 죽인 것 같다”고 말한다. 백화점 옥상에서 자신이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무기력하게 종일 잠들어 있는 내 남편을 보고 있으면요, 나는 조금 내가 견딜 만해졌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손님들에게서 받은 오십 전짜리 은화를 남편에게 건넬 때의 그 기분 같은 거.”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편이 외출에서 돌아와서는 받았던 돈을 되돌려주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참을 수 없도록 부끄러움을 느낀 연심은 해열제라고 속여 최면제 아달린을 남편에게 먹였다는 것. 그 일이 남편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것이 연심의 설명이다.

김태용 소설 ‘우리들은 마음대로’의 삽화.
김태용 소설 ‘우리들은 마음대로’의 삽화.

강영숙의 ‘마지막 페이지’는 ‘날개’의 인물들이 아닌 21세기 현재의 두 여성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서울 누하동 이상의 옛집 터를 등장시켜 원작과 이어주는 끈으로 삼는다. 이 소설에서 지난 시절 모종의 상처를 공유한 두 여자친구가 이상의 집 테라스에 올랐을 때 그 중 한명인 미란이 “두 팔을 벌린 채 턱을 들고 산을 향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는 마지막 장면은 ‘날개’의 결말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다시 쓴 것으로 읽힌다.

최제훈의 ‘1교시 국어영역’은 ‘날개’가 지문으로 나온 수능 문제를 푸는 재수생의 독백 형식을 띠었다. 문제 풀이보다는 여자친구와 관계에 대한 고민에 더 골몰하는 수험생은 소설 마지막에서 “풀자. 풀자. 풀자. 한 문제라도 더 풀자꾸나”라며 힘겹게 자신을 다독인다. 이승우의 ‘사이렌이 울릴 때’는 밤에 연심의 집을 찾는 남자와 연심의 남편이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마주친다는 설정을 취했고, 박솔뫼의 ‘대합실에서’는 옛 미쓰코시 백화점인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과 서울역, 회현지하상가 등을 배회하는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좇으며 “많은 것이 반복되고 있다”는 주제를 부각시킨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