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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런던은 문학을 낳고, 문학은 런던을 기억했다

등록 2018-07-05 19:39수정 2018-07-05 20:03

작가·출판인이 그린 ‘문학도시, 런던’
초서·셰익스피어·디킨스·울프 등
런던에 남긴 작가와 작품 흔적 좇아
사건과 일화로 듣는 영문학사
문학의 도시, 런던
엘로이즈 밀러·샘 조디슨 지음, 이정아 옮김/올댓북스·1만6500원

어느 대형서점의 구호를 응용해보자. 사람은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사람을 키운다. 그렇게 도시의 품에서 성장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안에 그 도시를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한다. 도시와 작가, 도시와 작품 사이에 유기적 관련성이 생긴다. 도스토옙스키의 페테르부르크, 조이스의 더블린, 폴 오스터의 뉴욕 등이 그런 사이다.

“디킨스도 직접 말했듯이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등장인물은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였다. 디킨스의 소설에 등장하지 않은 자치구나 거리가 거의 없을 정도다. 코번트 가든을 걸어가다 보면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도라를 위해 꽃을 샀던 꽃 시장이나 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공연을 봤던 극장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 클러컨웰 그린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우스꽝스럽게 소매치기를 시도하는 장면에 등장했던 곳이다.”

영국의 작가·출판인 두사람이 함께 쓴 <문학의 도시, 런던>은 런던이라는 도시와 작가·작품들이 맺은 관계를 다각도로, 그리고 촘촘하게 훑는다. 영문학의 출발점에 놓인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부터 제이디 스미스의 <하얀 이빨>(2000)까지 600년 남짓한 영국 문학사를 런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구성해 보여준다. 연대순이 아니라 주제별 서술 방식을 택하긴 했지만, 21개 장으로 나뉜 책을 통독하면 영국 문학사의 얼개가 어느 정도는 잡히는 느낌이 든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버러 하이 스트리트의 태버드 여관에서 시작한다. 19세기 말에 헐려서 그렇지 이 여관은 실제로 존재했던 곳이다. (…) 초서의 수다스러운 순례자들은 곧 태버드를 나와 켄트로 떠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런던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성인이 된 셰익스피어는 20여년 동안 경이로울 정도로 다작을 하면서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냈다. (…) 셰익스피어가 없는 런던도 생각할 수 없다.”

<문학의 도시, 런던>은 런던 곳곳에 새겨진 작가와 작품의 흔적을 꼼꼼하게 챙겨 설명해준다. 사진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올리버 트위스트>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문학의 도시, 런던>은 런던 곳곳에 새겨진 작가와 작품의 흔적을 꼼꼼하게 챙겨 설명해준다. 사진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올리버 트위스트>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영문학의 시조라 할 <캔터베리 이야기>와 영국의 자존심 셰익스피어부터가 런던을 배경 삼거나 그곳에서 활동했다. 셰익스피어보다 수십년 뒤 사람인 일기 작가 새뮤얼 피프스는 1666년 런던 대화재와 흑사병의 공포를 일기로 남겼다. 파크 스트리트 34번지의 술집 ‘앵커’는 피프스가 대화재를 지켜본 장소이자 셰익스피어의 단골집이었으며 새뮤얼 존슨이 최초의 영어 사전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 사람 카를 마르크스는 영국 국립도서관 엘(L)13 좌석에 앉아 <자본>을 썼고, 그의 이념을 받아들인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그로부터 50년 뒤 이용자 카드에 ‘야코프 리히터’라는 이름을 기입하고 같은 자리에 앉았다. 뉴게이트 감옥은 <캔터베리 이야기>와 셰익스피어 희곡 <헨리 6세> <리처드 3세>에도 등장하며, 존 밀턴은 이 감옥 마당에서 자신의 책들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1902년 문을 닫기 전에 이 감옥은 ‘뉴게이트 소설’로 일컬어지는 범죄자 주인공 소설 장르를 탄생시킴으로써 영문학사에 기여했다.

영국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블룸스버리 스트리트는 ‘블룸스버리 그룹’의 탄생지다. 버지니아 울프 부부와 버지니아의 언니인 바네사 벨 부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작가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등으로 이루어진 이 모임과 관련한 장소들은 현재 술집과 호텔, 빵집 등으로 남아 있다. 지은이들은 영국 작가들뿐만 아니라 폴 베를렌, 도스토옙스키, 마크 트웨인, 허먼 멜빌 등 런던을 방문한 외국 작가들과 작품의 흔적 역시 살뜰하게 챙겨서 알려준다.

“런던 같은 도시에는 언제나 온전한 정신이 조금은 남아 있는 미치광이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책방에 쉽게 끌린다. 그 이유는 책방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오랫동안 어슬렁거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 서점에서 일하기도 했던 조지 오웰의 말이다. ‘책방’의 자리에 작가 및 작품을 놓는다면, 런던은 지금도 매력적인 여행지가 될 법하다. 이 책 <문학의 도시, 런던>의 안내를 받아 가며 런던의 이 거리 저 골목을 어슬렁거리면 어떨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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