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문학동네·1만3000원
<여름, 스피드>는 ‘커밍아웃 한 첫 게이 소설가’ 김봉곤(사진)의 첫 소설집이다. 등단작인 중편 ‘Auto’와 다섯 단편이 묶였는데, 모두가 게이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다.
“상경 후, 내적 갈등을 끝낸 스물네 살 겨울 이후로 나는 단 한순간도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잊고 산 적이 없었다. 과장이 아니라 내가 보는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실과 사정과 사건이 내가 게이라는 걸 지시하거나 게이가 아님이 아님을 지시했으니까. 나는 그 생각에서 벗어나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라스트 러브 송’)
인용한 대목을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게이라는 정체성은 그의 삶 전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어지는 문장들은 게이를 바라보는 편견 섞인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린다. “그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게 내 기쁨이었다.”
소설집 <여름, 스피드>는 고통이 아닌 기쁨으로서 게이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굳이 국립국어원에서 ‘이성 간의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정의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존재한다”(‘Auto’)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남자들의 이야기. 앞서 인용한 ‘라스트 러브 송’의 주인공 겸 화자는 자신들의 사랑이 단지 기쁨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기적이라고까지 말한다. “당신과 내가 만난 건 기적이에요. 거기에다 당신과 내가 게이일 확률을 곱해버리면 그 기적은 무한대가 되어버렸다.”
그 엄청난 기적이 주는 기쁨과 쾌락을 좇아 김봉곤 소설집 속 남자들은 사랑할 대상을 찾고 그리워한다. 동성애가 됐든 이성애가 됐든, 오로지 사랑하는 일의 행복과 고통에만 집중한 소설집이 따로 있었나 싶게 그들은 사랑에 매달린다. 적잖은 작품에서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유증에 시달리며 “남자 따윈 이제 정말 필요 없다”(‘컬리지 포크’)거나 “너한테 다시는 휘둘리지 않겠다고 결심”(‘여름, 스피드’)하거나 “사랑하는 데에 지쳐 있었다”(‘라스트 러브 송’)고 토로하지만, 그런 결심과 각오는 이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들은 머지 않아 새로운 남자를 만나 “그와 자게 될 것이라고 확신”(‘컬리지 포크’)하거나 “아, 정말 이 수염은 나 좋으라고 난 거야? 나 좋자고 이렇게 생기신 거예요?”(‘디스코 멜랑콜리아’)라며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들고 만다.
그 사랑이 결실을 거두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실연과 배신 또는 죽음으로 파탄에 이르는 사례가 더 많다. 그럴 때 이 소설집 속 남자들은 “글을 쓴다. 그를 쓴다.”(‘Auto’) 김봉곤의 등단작이기도 한 ‘Auto’의 이 말장난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를 쓰는 것, 그러니까 ‘그’와의 사랑을 글로 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작품에는 “나의 글쓰기만큼 내밀한 사랑 (…) 나의 사랑만큼 내밀한 글쓰기”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그에게 글쓰기와 사랑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때로는 모든 글이 나에겐 오토픽션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고 ‘Auto’의 주인공 겸 화자는 말한다. 오토픽션이란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를 말하거니와, 게이 소설가가 게이의 사랑을 주제로 쓴 이 소설집 전체가 그런 의미에서 손색없는 오토픽션이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