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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작게 존재하겠다” 확고한 철학…예술품이 된 핸드메이드 그림책

등록 2018-07-16 17:51수정 2018-07-16 20:48

인도 그림책 출판사 ‘타라북스’

“소수민족 직접 목소리 낼 수 있게”
전통미술 손으로 일일이 찍어내

“누구나 끝없이 성장할 수 없어…
직원 행복 위해 규모 늘리지 않아”

타라북스 운영의 철학 담은 책
<우리는 작게 존재합니다> 출간
10월까지 현대어린이책미술관서
원화 등 담은 ‘타라의 손’ 전시회
11일 경기 판교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타라의 손’ 전시회에서 타라북스 운영자인 브이 기타(왼쪽)와 기타 울프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11일 경기 판교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타라의 손’ 전시회에서 타라북스 운영자인 브이 기타(왼쪽)와 기타 울프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밤처럼 거칠거칠한 검은 종이 위에서 독특한 형상의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난다. 반딧불이들을 품은 셈바르 나무, 조물주의 집인 보리수 나무, 세상을 머리에 이고 있는 뱀 여신의 나무…. 각각의 나무 그림에 붙은 말들은 신화적인 분위기를 더 짙게 만든다. “조물주는 자기 몸에서 털 세 오라기를 뽑아 커다란 나무 세 그루를 만들었어요. (…) 자기 머리칼을 덮고 있는 재를 훑어 나무에 뿌렸더니,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어요.” 책장을 넘기다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이런 그림책을 만들 수 있었을까?’

<나무들의 밤>이란 제목의 이 그림책을 만든 ‘타라북스’는 인도 첸나이 지역에 있는 그림책 전문 출판사다. 다양한 인도 소수 민족의 전통 미술을 직접 제작한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정성들여 찍어내는 타라북스의 ‘핸드메이드’ 그림책들은 볼로냐국제어린이도서전에서 상을 받는 등 전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나무들의 밤> 뿐 아니라 <배고픈 사자> <물 속 생물들> 등 타라북스의 작품들이 10여종 출간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아 왔다.

지난 11일 오후 타라북스의 운영자 기타 울프와 브이 기타를 경기도 성남시 판교 현대백화점에 위치한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만났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7월12일부터 10월28일까지 타라북스 그림책의 원화 등을 만날 수 있는 ‘타라의 손’ 전시회를 열고 있다. 때마침 일본의 출판 편집자 등 3명의 지은이가 타라북스를 탐방해 타라북스의 그림책 철학을 소개한 책 <우리는 작게 존재합니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타라북스>(남해의봄날)도 최근 출간되기도 했다. 타라북스에서 일하는 직원들, 두 운영자, 이들과 교류하는 사람들 등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타라북스의 역사와 운영 철학 등을 잘 정리해 담아놓은 책이다. 타라북스의 개성 넘치는 책들은 두 운영자가 공유하고 있는, 그림책에 대한 확고한 철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울프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책’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 직접 보고 만지는 것이 새로운 경험을 이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타는 “핸드메이드, 어린이책, 예술에 대한 질문, 책을 통한 교육, 인쇄 공정에서의 다양한 탐구와 실험” 등 다섯가지를 타라북스가 추구하는 가치로 꼽았다.

11일 경기 판교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타라의 손’ 전시회에서 대표작 <나무들의 밤>의 나무 원화들 사이에 선 브이 기타(왼쪽)와 기타 울프.
11일 경기 판교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타라의 손’ 전시회에서 대표작 <나무들의 밤>의 나무 원화들 사이에 선 브이 기타(왼쪽)와 기타 울프.
핸드메이드 작품을 만들게 된 것은 우연이 연속된 결과라고 한다. 출판사를 시작하기 직전인 1994년, 울프는 자신이 할머니로부터 들은 옛 이야기에 소수 민족 화가가 그림을 그린 작품을 들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북페어를 찾았다. 시간이 빠듯해 ‘오프셋’ 인쇄(일반적인 평판 인쇄)를 하지 못했고, 손으로 뜬 종이에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 두 장짜리 견본만이 작품의 전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견본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달라’는 조건으로 주문을 따냈고, 이것이 그 뒤로도 핸드메이드 그림책들을 만들어낸 계기가 된 것이다.

타라북스의 핸드메이드 그림책은 독특한 인쇄 방식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도 소수 민족들의 예술을 담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공용어만 해도 24개에 이를 정도로 인도에는 수많은 소수 민족과 언어가 존재하지만, 여기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울프는 “보편적인 언어와 질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그림책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 주된 목표다. 무엇보다 그들의 작품은 힘 있고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벽이나 바닥 등에 그려넣은 그들의 예술을 그림책이라는 매체로 담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기타는 “작가들의 의지와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길 원했던 <런던 정글북>의 경우, 우리도 최대한 이 과정을 도왔다. 반면 <인도의 동물들>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기존의 작업 모티프를 최대한 그대로 그림책에 담아내는 데 집중한다”고 밝혔다.

타라북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나무들의 밤>의 한 장면.
타라북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나무들의 밤>의 한 장면.
흥미로운 사실은 전체 타라북스 책들 가운데 핸드메이드의 비중은 2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80%는 일반적인 인쇄로 만들어내는데, 이들을 관통하는 가치 역시 핸드메이드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핸드메이드보다 컨셉트나 디자인 측면에서 더 실험적인 책들도 많다. 기타는 “한눈에 봐도 특별해보이는 핸드메이드와 다르게, 일반 인쇄 그림책들에는 뭔가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예컨대 <매치박스>라는 그림책은 표지에 성냥갑 디자인을 그대로 채용했는데, 귀여운 디자인과는 다르게 성냥 공장의 아동 노동 착취를 다룬 책”이라고 말했다.

인도 소수 민족의 천연 염색 예술을 그림책으로 담은 <어머니 여신의 천>.
인도 소수 민족의 천연 염색 예술을 그림책으로 담은 <어머니 여신의 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우리는 작게 존재하기로 결정했다”는 타라북스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현재 타라북스의 전체 직원은 25명 정도인데, 타라북스는 규모를 늘리지 않고 직원들이 최대한 행복해할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왔다. 애초 손으로 뜬 종이에 한 장 한 장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야 하는 핸드메이드 그림책은 일정 수량 이상을 만들어낼 수 없다. 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꼭 나눠야 할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직종의 하루를 보여주는 그림책 시리즈를 만들다가, 이야기의 대상이었던 ‘풍선 장수’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시리즈 전체를 중단한 적도 있다. 기타는 “여섯 달 안에 2000부를 찍어낸다면, 우리 그림책을 원하는 독자들에겐 좋은 일이지만 우리 직원들은 행복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더이상 독자들이 바라는, 타라북스의 가치가 담긴 그림책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끝없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울프는 “책을 만드는 일은 다른 종류의 산업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작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에 두 사람은 “타라북스가 첸나이 한국문화관과 함께 6개월 동안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알려달라”고 했다. 최근 타라북스는 인도 소수 민족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작가들의 작품도 출간하길 원하고 있다. 일본 작가의 그림책 <똑똑! 똑똑!>을 펴내는 등 특히 일본 작가들과의 협업이 활발하다고 한다. 한국의 그림책 업계에 대해, 두 사람은 “한국의 출판사들은 출판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작품들도 위험을 감수하고 출판하는 등 남다른 에너지와 의지, 더 나아가 역량까지 갖추고 있다. 무척 인상깊다”고 평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현대어린이책미술관·남해의봄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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