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앨런 듀가킨·류드밀라 트루트 지음, 서민아 옮김/필로소픽·1만8000원 스탈린의 기세가 등등하던 1952년 소비에트의 어느 가을날, 젊은 유전과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는 발트해 연안의 도시 탈린(현 에스토니아 수도)행 기차를 탔다. 정부가 운영하는 모피 동물 품종개량 연구소의 선임과학자가 되어 여우와 밍크를 대량 사육하는 농장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모피용 육종 개량이 아닌 다른 야심이 있었다. 야생동물의 가축화라는 유전학적 진화 연구였다. 스탈린 체제는 유전학 연구를 탄압했다. 유전학 연구가 유물론에 맞지 않다는 구실을 댔다. 뛰어난 유전학자였던 드미트리의 형은 이 과정에서 숙청당했다. 그는 연구소 책임자인 니나 소로키나에게 자신의 연구계획을 설명하고 비밀리에 실험을 시작했다. 은여우 농장에서 행동이 온순한 여우들을 골라내 교배를 시켰다. 늑대가 어떻게 인간의 반려동물인 개로 진화했을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늑대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은여우를 실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적어도 수천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가축화가 이 실험에서 6세대 만에 이뤄진 것이다. 선별된 집단의 자손들 외양은 개처럼 꼬리가 말리고 귀가 접혔으며, 꼬리를 흔들며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행동했고 실험자를 핥거나 냄새를 맡았다. 여우도 개처럼 길들여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엘리트 여우’가 탄생한 것이다. 반세기 동안 벨랴예프의 연구 동반자였던 류드밀라 트루트가 미국 행동생태학자 듀가킨과 함께 쓴 책으로 연구 시작부터 벨랴예프 사후, 동물의 가축화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되는지까지 60년 넘는 연구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했다. 과학실험 이야기임에도 영화를 보는 듯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곳곳에 포착된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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