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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리스본에 있으면서 리스본을 그리워하는 일, 여행

등록 2018-07-26 20:01수정 2018-07-26 20:49

김연수 여행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
“소설은 낯선 시공간 찾아가는 여행담”
협재에 시집 파는 문구점 열고픈 꿈도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지음/컬처그라퍼·1만4000원

‘언젠가, 아마도’라는 제목에는 막연한 기대와 예감이 담겼다. 그런 기대와 예감이 향하는 대상은 여행. 이 책 지은이인 작가 김연수는 “언젠가 아마도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며 그 여행에서 “누군가를 만나리라”고 기대하고 예감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의 여행 체험을 다룬 여행 에세이인데, 여정의 기록과 여행지의 풍광 묘사가 주를 이루는 여느 여행기와는 결을 달리한다. 여행의 어느 한 순간 또는 계기에 집중해 그로부터 인간과 세계에 관한 자신만의 사유를 건져올리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우선 그는 “여행을 통해 비정함을 익혔다”고 말한다. 여행과 비정함이라니. 도대체 둘이 무슨 상관이관데? “여행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 여행에서 알게 됐노라는 설명을 듣고 나면 멀어만 보였던 두 낱말 사이의 거리가 급속도록 좁혀지는 듯하다.

여행을 마치고 온 그를 만난 지인들은 ‘살은 왜 그렇게 빠졌느냐’고 묻곤 한다. 여행자 김연수의 다이어트에는 그만의 여행법이 한몫한다. 그에게 여행은 “오랫동안 기다린 책”과도 같다. 그런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읽어야 하는 것처럼, 여행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서 구경해야만 한다.” 그러니 살이 빠질 수밖에.

소설가 김연수가 여행에 관한 짧은 산문들을 모은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를 펴냈다. 사진은 2008년 노르웨이의 송네 피요르드에 갔을 때의 모습. 김연수 작가 제공
소설가 김연수가 여행에 관한 짧은 산문들을 모은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를 펴냈다. 사진은 2008년 노르웨이의 송네 피요르드에 갔을 때의 모습. 김연수 작가 제공

그런데 사실 그는 여행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란다. 오히려 낯선 장소에 있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고. 그럼에도 그가 평균 이상의 여행 경험을 지니게 된 것은 “오로지 소설가가 됐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소설에는 욕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하게 마련인데, 욕망하는 이는 헤매게 되어 있고, ‘헤맨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그게 바로 ‘여행’이라는 것. 소설을 비롯한 모든 이야기가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을 찾아가는 여행담이라 할 수 있”다는 그의 소설관이 이에서 비롯된다.

헤매는 주인공의 여정을 실감나게 글로 옮기기 위해 소설가인 그는 자주 여행을 다니게 되는데,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소설을 잘 쓰려면 더 자주 여행을 가야만 하는데, 여행을 가게 되면 소설가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는 것.” 여행을 다니며 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김연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 가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자연스레 낮부터 술을 마시게 된다”는 것. 그런 스타일이 김연수만도 아닌 것이, 베를린의 유명한 동물원을 코앞에 둔 숙소에 며칠 동안 묵었으면서도 정작 동물원 울타리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어가 보지 않고 술만 마시다가 떠나온 선배 소설가들도 있지 않겠는가.

“내 여행의 동반자는 파란색 <론리 플래닛> 가이드와 로컬 맥주다. 2005년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다음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 있는 중.” 김연수 작가 제공
“내 여행의 동반자는 파란색 <론리 플래닛> 가이드와 로컬 맥주다. 2005년 독일 최고봉 추크슈피체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다음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 있는 중.” 김연수 작가 제공

‘걷지 않으면 술 마시기라니, 그럴 바에야 일산 호수공원과 라페스타에 있지 뭐 하러 멀리 여행을?’이라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여행만이 주는 감각의 고양과 사무치는 심사를 그라고 왜 경험하지 못했겠는가. 그가 석양 무렵 리스본의 명물 28번 트램을 타고 영화 <리스본 스토리>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들으면서 “마치 한 시대가, 한 생애가 끝나는 순간의 감정처럼 막대한 노스탤지어”를 느낄 때, 몽골 고비사막 모래 위에 누워 낙타 몰이 처녀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할 때, 카파도키아에서 우연히 찍은 짧은 영상에 담긴 알 수 없는 빛의 움직임을 보며 “그때까지 살면서 느낀 슬픔과 고통을 단숨에 위로받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 독자는 당장이라도 공항으로 달려가고픈 충동에 엉덩이를 들썩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연필을 사랑해서 여행할 때마다 현지의 연필을 사 모은다는 그의 꿈을 소개한다. 제주 협재에 바다가 보이는 문구점 ‘필시’(筆詩)를 열고 싶다는 것. 시집과 연필과 공책을, 반드시 묶음으로만 판다. 그 연필로 자작시를 써 오는 이에게는 그 시를 연필 한 자루와 바꿔 준다. 그렇게 모은 시들을 문구점 벽에 붙인다. 벽이 다 차면 천장에 붙이고, 그도 모자라면 바깥 백사장에 늘어 놓는다…. 언젠가, 아마도 이뤄지지 않을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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