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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소액금융, 구빈의 마술봉인가 약탈적 자본인가

등록 2018-07-26 20:09수정 2018-07-26 21:23

빈민층 구제 위한 소액금융이
개발-금융자본의 신개척지 돼
인간 중심의 본디 뜻 되살려야
빈곤자본-소액금융과 개발의 패러다임
아나냐 로이 지음, 김병순 옮김/여문책·2만3000원

1989년 여름,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이란 논문에서 서구의 자유시장 경제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공언했다. 그해 11월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 공산권이 몰락하면서, 그는 일약 스타가 됐다.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자본이 민영화, 규제철폐, 금융자유화라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의 세계화에 합의한 ‘워싱턴 컨센서스’가 이어졌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야심찬 선언은 불과 10여년 만에 역사의 종말을 맞았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극심한 부의 편중과 절대다수의 빈곤을 낳았고, 제프리 삭스가 주장한 <빈곤의 종말>(2005) 담론이 절박한 현실이 됐다. 1970년대 방글라데시에서 시작된 극빈층 구제 금융 프로그램인 ‘마이크로 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가 “새로운 개발모형의 탄생”으로 유엔 차원의 주목을 받고, 그라민 은행과 그 설립자 무함마드 유누스가 노벨평화상(2006년)까지 받은 이유다. 개발경제학자들뿐 아니라 여러 나라 정부와 유엔에서까지 빈곤층 자활과 창업을 지원하는 소액금융의 모범 사례들에 주목했다. 소액금융은 정말로 빈곤을 퇴치하고 자본주의를 탐욕의 늪에서 구해줄 마법의 지팡이인 걸까?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인도 동부 자르칸드주의 도시 덤카에서 소액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은 여성들이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죽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방글라데시와 인접한 인도 동부 자르칸드주의 도시 덤카에서 소액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은 여성들이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죽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소액금융을 놓고는 찬사와 우려가 엇갈린다. 가난이라는 대량살상무기에 맞서는 ‘대량구제무기’라며 기대감을 보이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빈민을 빚의 굴레에 옭아매고 의존성만 키우는 약탈자본이란 비판까지 나온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불평등 문제 연구자인 아나냐 로이의 <빈곤자본>은 소액금융이 거대자본의 글로벌 금융 질서에 포섭되면서 또 하나의 이윤 시장으로 변질되는 역설에 주목한 책이다. 빈곤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선 빈곤의 실체와 구조적 재생산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빈곤 문제 담론을 주도하는 전문가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했다. 영어 초판(2011년)이 나오기까지 취재와 연구, 집필에만 6년이 걸렸다.

로이는 이 책에서 빈민층 구제를 위한 소액금융을 ‘빈곤자본’으로 개념화하고 그 작동 방식을 분석한다. 이때 빈곤자본은 금융대출과 부의 생산뿐 아니라 빈곤에 관한 지식의 생산과 유통까지를 아우른다. 로이는 또, 정작 그들 자신은 빈곤층과는 거리가 멀지만 빈곤에 관한 권위있는 지식을 생산하고 빈곤 완화 의제를 설정하는 전문가들을 ‘이중행위자’라고 지칭한다. “권력체계의 안팎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대개 현재의 상황에 연루돼 있지만, 또한 때때로 기존의 사회통념에 도전하려고 애쓰는 개인과 기관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이들 이중행위자는 빈곤자본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왜곡을 집요하게 비판하면서도, 현존하는 금융 시스템 안에서 협업할 수밖에 없는 ‘공모의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방글라데시의 빈민 구제 소액대출 운동을 이끈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무함마드 유누스가 200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해 빈곤 퇴치에 앞장선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방글라데시의 빈민 구제 소액대출 운동을 이끈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무함마드 유누스가 200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해 빈곤 퇴치에 앞장선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빈곤자본은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게 가능한지에 대한 새삼스런 논란을 낳았다. 예컨대, 멕시코의 소액금융기관 콤파르타모스는 가톨릭계 비정부기구(NGO)였지만 2000년 이후로 영리 추구 금융기관이 됐다. 증권시장에서 기업공개로 4억5800만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는데 그 수익금의 절반 이상이 거기에 투자한 개발기구들에 돌아갔다. 콤파르타모스가 한 해 100만명 가까운 빈민층에 돈을 빌려주는 대출 규모는 약 4억 달러, 수익은 8000만 달러에 이른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콤파르타모스가 자본 축적의 신개척지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이라고 지은이는 강조한다. 그렇게 빈곤은 “개발자본과 금융자본이 합쳐지고 협력하는 ‘비우량 신개척지’가 된다.”

앞서 1995년, 미국 워싱턴에서 신설된 국제개발기구 하나가 개발도상국 대부금 제공이 주업무인 세계은행 건물에 입주했다. 당시 세계은행 총재였던 제임스 울펀슨이 주도한 ‘빈곤층을 위한 국제자문그룹(CGAP)’이 그것. 울펀슨은 “가난한 사람은 소액 창업을 통해 자신의 저축과 노동력을 써서 하루하루 살아남고 빈곤 탈출에 필요한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는 “자문그룹의 소액금융 의제는 궁극적으로 소액창업 개발이나 여성 역량강화와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 오히려 가난한 사람을 금융시장에 통합하는 데 주목했다”고 비판한다. “인간개발을 강조하는 소액금융의 방글라데시 모델과는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이 기구의 부상은 “소액금융 세계의 중심이 방글라데시에서 워싱턴, 그 중에서도 세계은행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방글라데시 출신 인류학자 라미아 카림의 <가난을 팝니다>(2015, 오월의봄)라는 책도 ‘가난한 여성들을 착취하는 착한 자본주의의 맨얼굴’(부제)을 고발한 책으로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 그라민은행을 비롯한 소액금융기구들이 자랑하는 98%의 높은 대출 회수율의 어두운 이면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순 없는 노릇. 로이나 카림이 말하려는 건 소액금융 무용론이 아니라 대출 받는 빈민을 삶의 주체로 세우는 소액금융의 본디 취지를 제대로 살리자는 거다. 이들이 책에서 그 구체적 방안들까지 명료하게 내놓지 않은 건 그게 우리 모두의 과제라는 뜻일까.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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