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으로 본 세계사-판사의 눈으로 가려 뽑은 울림 있는 판결
박형남 지음/휴머니스트·2만원
‘사법농단 의혹’은 충격과 분노로 한여름을 들끓게 하고 있다. ‘그래도 설마’ 했던 법원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깨져가는 와중에, 현직 판사가 쓴 <재판으로 본 세계사>를 들춰보며 작은 위안을 얻는다. 비극으로든 희극으로든 거듭되는 역사는 확실히 시민을 가르친다.
이 책에는 인류사적 판결로 꼽힌 15가지 재판이 담겨 있다. 신을 모독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혐의로 기소된 소크라테스부터 지동설을 주장해 죽음 직전까지 간 갈릴레오 갈릴레이, 반역죄로 사형 당하게 되는 영국 왕 찰스 1세의 재판은 물론, 드레퓌스와 팽크허스트, 브라운, 아이히만, 미란다 등 고전과 같이 곱씹어볼 만한 이들과 관련한 재판들이 선별됐다.
1894년 프랑스의 유대인 출신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적국인 독일 간첩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뒤, 이듬해 다른 장교가 그의 계급장을 떼고 칼을 빼앗아 부러뜨리는 굴욕을 겪고 불명예 퇴역을 당하는 모습을 일간 <르프티 주르날>이 삽화로 실었다. 반독일, 반유대주의 기류의 희생양이 된 드레퓌스 재판에 대해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격문을 쓰는 등 프랑스 사회가 홍역을 앓았다. 사진 휴머니스트 제공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화석이 아니다. 당면한 우리의 현실을 겹쳐 볼 생생한 교훈들이 이 고전적 판례와 이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에 녹아들어 있다. 사회적 대립과 갈등이 집약적으로 드러나거나 폭발한 사건들에 대한 재판들만 선택된 이유다. 대통령이 탄핵되고 페미니즘 운동이 극렬히 펼쳐지며 난민을 둘러싼 논란과 최저임금을 둘러싼 갈등이 터져나오는 한국 사회는 이 책에 담긴 재판들과 시의적절하게 겹쳐진다.
찰스 1세 재판은 ‘박근혜 파면’으로 이어진 촛불시위를 떠오르게 한다.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전쟁을 되풀이하며 실정을 거듭한 찰스 1세는 처형됐다. 신하들과 전쟁을 벌이다 패배해 재판에 회부된 결과다. 왕권신수설이라는 낡고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군주의 비극적 결말은 한국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처럼 법에 의해 이뤄졌다. 찰스 1세의 참수와 함께 ‘왕의 시대’가 끝난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역시 대통령 탄핵은 ‘박정희 이데올로기’의 종언일 것이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세일럼 마을에서 열린 마녀재판정의 모습. 사진 휴머니스트 제공
‘노동시간 상한제’에 따른 홍역은 100여년 전 미국도 앓았다. 1905년 미국 제과업자 조셉 로크너는 ‘주당 60시간 노동시간 상한’을 규정한 뉴욕주의 ‘제과점법’을 어겨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 법이 ‘계약의 자유’에 위배되며 ‘적법절차’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로크너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적법절차’는 다른 경제 규제 관련 법률, 특히 노사관계 법률들을 무효화하는 데 자주 인용됐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이 시행되는 등 세상은 달라졌다. 결국 ‘로크너 시대’는 저물고 적법절차만을 이유로 경제 규제 법률이 위헌으로 판단되는 일은 사라졌다. 시대가 변화하면 법률도 법리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성차별 철폐는 오늘날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이다. 그렇다고 어느날 갑자기 페미니스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닐 터다. 서구 민주주의의 본산 영국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은 것은 90년 전인 1928년이었다. 19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오랜 투쟁의 결과였다. 20세기 초 전투적으로 변모한 투쟁의 선봉에 선 팽크허스트는 ‘국민평등선거법’ 시행을 한 달 앞두고 숨을 거뒀다. 팽크허스트가 이끈 전투적 운동가들은 유리창을 깨고 불을 질렀으며 구타와 체포, 투옥과 고문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팽크허스트는 과격한 시위 방법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사회적 정당성까지 훼손되지는 않았다. 1913년 투옥된 팽크허스트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은 이후 여성 참정권 운동에 더욱 강력한 도화선이 됐다.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 인종통합 교육을 실시하라는 판결(브라운 재판)을 내린 뒤, 아칸소주 리틀록의 한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들이 연방군의 보호를 받으며 등교하고 있다.
인류가 진보해온 마디마디마다 열려온 중요한 재판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낙관이다.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는 법정이 사회의 도저한 흐름에 뒤처져 있다 해도 명확한 것은 역행이 지속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역사적 재판들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이어져 온 논쟁과 투쟁, 특히 시민들의 문제 의식과 시대적 의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소중하다.
사법부의 독립을 둘러싼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는 오늘, 근본적인 법의 정신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묻는 무거운 화두를 흥미로운 이야기에 담아낸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역사학자를 꿈꿨으나 현재는 공정거래와 노동 행정사건을 전담하는 현직 재판장이 저자라는 것도 이 책이 나온 맥락을 짐작하게 한다.
김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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