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참 쓸모 있는 인간
김연숙 지음/천년의상상·1만4800원
땅을 부르는 말은 여러가지다. 흙, 대지, 토지. 비슷해 보이나 쓰인 맥락을 뜯어보면 차이가 난다. 가령 농촌계몽에 앞장서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흙>(이광수)은 세상의 부조리와 대조되는 순수의 세계를 상징하며, 중국 격변기를 헤쳐가는 왕룽일가의 일대기 <대지>(펄 벅)는 유한한 목숨붙이들이 살아가는 광활한 자연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토지>는 어떠한가. 소설가 박경리는 제목을 ‘토지’로 정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토지라고 하면 반드시 땅문서를 연상하게 되고 ‘소유’의 관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역사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문학 박사로 대학에서 ‘고전 읽기: 박경리 <토지> 읽기’ 교양 강좌를 6년간 이끌어온 김연숙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소유라는 본질적 욕망을 둘러싼 갈등과 비극, 그 속에서 <토지>의 등장 인물들이 펼쳐내는 갖가지 삶의 무늬에 주목한다. 박경리가 26년간 작성한 원고지 4만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600여명. 김 교수는 이 “겁나 많은” 인물들의 삶을 인간·계급·가족·돈·사랑·욕망·부끄러움·이유·국가 등 모두 9가지의 분류 틀에 넣어 성찰한다.
<토지>는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돼 인기를 모았다. 2004년 방영된 드라마 <토지>(SBS)에서 서희를 맡은 김현주(왼쪽)과 길상역으로 나온 유준상.
가령 욕망. 돈이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드는 임이네와 문중 재산을 빼앗은 조준구를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는 서희는 둘 다 ‘욕망의 화신’이다. 그러나 임이네 인생 목표는 오로지 돈에 수렴되는 반면, 서희는 복수를 위해 악착같이 재산을 모으면서도 평사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임이네와 질적으로 다른 삶을 보여준다. 욕망이 나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욕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욕망으로 내 삶을 어떻게 움직여나가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은 ‘부끄러움’에서도 중요한 일이다. 세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용이는 ‘부끄러움의 끝판왕’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용이가 살아간 힘을 이 부끄러움에서 찾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 (…) 그래서 용이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서 머무르지 않고 그로부터 자기 자신을 바라다보고, 자기 삶의 무게를 견디어나갔다.”
<토지>의 인물들이 빛나는 대목은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천하의 악인인 부모에게 빌붙어사는 것에 괴로워하던 조준구 아들 병수는 목수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찾으면서 부모로부터 해방된다. 살인을 저지른 아버지와 밀정 짓을 하는 형 때문에 주눅들어 사는 한복이가 가족의 멍에에서 풀려나는 것도 길상이의 이 말 때문이었다. “너의 가난과 핍박을 아버지와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토지>가 주는 감동은 “가장 무력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찾아나간 사람들”에 있다. 한치 앞 안 보이는 순간에도 한 발 한 발 내디딘 그들의 삶을 놓고 어떻게 성공과 실패로 예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지은이의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의 감상문은 곰곰 되새길 만하다. “취업이 중요하지만 잘 안 된다고 그것은 실패한 삶이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각각 하나의 잣대일 뿐이지, 나를 판단하는 단 하나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 혹여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고 좌절감이 들 때, 나에게 다가와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고, 여전히 너의 삶에는 다양한 측면이 있다고 나를 위로해줄 <토지>의 수많은 인물이 있지 않은가.”
이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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