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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백 많고 밀도 높은 트레버 단편의 진수

등록 2018-08-23 19:54수정 2018-08-23 20:11

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한겨레출판·1만4000원

아일랜드 소설가 윌리엄 트레버(1928~2016·사진)는 한국에서는 뒤늦게 ‘발견’된 작가다. 2015년 단편선집이 처음 번역 출간된 데 이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단편집 <비 온 뒤>와 장편 <여름의 끝> <루시 골트 이야기>가 잇따라 나왔다.

최근 번역 출간된 그의 또 다른 단편집 <그의 옛 연인>은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트레버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트레버는 여백이 많고 담백한 문장으로 인간의 미묘한 심리와 관계를 날렵하게 포착한다. 솜씨 좋은 화가가 단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의 형태와 본질을 고스란히 잡아내듯, 그는 최소한의 단어와 구문으로 삶의 단면을 드러내며 그를 통해 세계의 진상을 폭로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죄책감’이다. 트레버 소설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들 때문에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간다. 철없던 소년 시절에 저지른 사건 때문에 집을 떠나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수십년째 먼 타국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감응성 광기’의 주인공 앤서니가 대표적이다. 소설은 앤서니와 둘이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혼자 저지르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운 짓을 함께했”던 친구 윌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문제의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앤서니는 종적을 감추며, 주변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여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윌비는 이국 도시의 식당에서 일하는 그를 우연히 마주친다. 둘이 함께 저지른 짓을 “사고, 예상을 넘어선 불행, 예기치 않았던 일”로 치부하며 희귀 우표 수집을 취미 삼아 “안전하고 간접적인 우표의 세계”에 안주해 왔던 윌비는 여전히 스스로를 벌하고 있는 앤서니를 보며 잊었던 죄책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오헨리상 수상작인 ‘재봉사의 아이’도 죄책감을 다루고는 있지만, 여기서는 결이 사뭇 다르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엄마는 오히려 증거를 은폐해 가해자인 남자가 처벌을 받지 않도록 돕는다. 평소 평판이 좋지 않았던 여자가 가해 남성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비밀을 공유한 두 사람이 죄책감과 보상 심리를 통해 결합할 뜻밖의 가능성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외도와 살인을 저지른 남편을 위해 위증을 마다 않았으면서도 일종의 복수로서 그 역시 외도를 저지르고 결국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여자를 등장시킨 ‘방’에서도 범죄 목격자 또는 증인의 미묘한 은폐 심리는 복잡하고도 섬세하게 그려진다.

‘속임수 커내스터’는 이른 나이에 병으로 아내를 잃게 된 남자의 슬픔을 잔잔하게 그린다. 기억을 잃어가며 남편조차 몰라보게 된 아내를 상대로 카드 게임 커내스터를 하며 남편은 짐짓 아내에게 져준다. 아내와 함께 오곤 하던 베네치아에 홀로 여행을 온 남편은 단골 식당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는 부부를 보며 생각한다. “저들은 지금 무얼 낭비하고 있는지.”

트레버의 단편들은 짧은 분량이지만 밀도가 매우 높아 허투루 읽히지 않는다. 질긴 고기를 씹듯 천천히 문장들을 음미하노라면 완독 뒤의 성취감과 쾌감은 그만큼 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Lord Snow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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