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한겨레출판·1만4000원 아일랜드 소설가 윌리엄 트레버(1928~2016·사진)는 한국에서는 뒤늦게 ‘발견’된 작가다. 2015년 단편선집이 처음 번역 출간된 데 이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단편집 <비 온 뒤>와 장편 <여름의 끝> <루시 골트 이야기>가 잇따라 나왔다. 최근 번역 출간된 그의 또 다른 단편집 <그의 옛 연인>은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트레버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트레버는 여백이 많고 담백한 문장으로 인간의 미묘한 심리와 관계를 날렵하게 포착한다. 솜씨 좋은 화가가 단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의 형태와 본질을 고스란히 잡아내듯, 그는 최소한의 단어와 구문으로 삶의 단면을 드러내며 그를 통해 세계의 진상을 폭로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죄책감’이다. 트레버 소설의 주인공들은 스스로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잘못들 때문에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간다. 철없던 소년 시절에 저지른 사건 때문에 집을 떠나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수십년째 먼 타국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감응성 광기’의 주인공 앤서니가 대표적이다. 소설은 앤서니와 둘이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혼자 저지르기에는 너무 수치스러운 짓을 함께했”던 친구 윌비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문제의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안 있어 앤서니는 종적을 감추며, 주변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 여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윌비는 이국 도시의 식당에서 일하는 그를 우연히 마주친다. 둘이 함께 저지른 짓을 “사고, 예상을 넘어선 불행, 예기치 않았던 일”로 치부하며 희귀 우표 수집을 취미 삼아 “안전하고 간접적인 우표의 세계”에 안주해 왔던 윌비는 여전히 스스로를 벌하고 있는 앤서니를 보며 잊었던 죄책감을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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