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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는 싸움에 온몸을 던지는 ‘바보’들

등록 2018-08-30 19:43수정 2018-08-30 20:02

복만이의 화물차
고광률 지음/강·1만5000원

고광률(사진)의 소설집 <복만이의 화물차>의 주인공들은 부조리한 세상의 크고 작은 악에 맞서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이(利)만 있고 의(義)는 없는 세상”(‘영춘’), “돈이 곧 정의인 세상”(‘순응의 복’)에서 ‘밥’과 ‘신념’의 일치를 위해 안간힘을 쏟지만, 세상의 견고한 질서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대체로 작가와 같은 ‘86 세대’인 그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경험했으며, 남다른 정의감으로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에 맞선다. 그러나 그들이 벌이는 싸움은 크게는 공권력의 훼방이나 방조 때문에, 작게는 가족의 몰이해와 생활의 압박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며 소설이 끝나도록 이렇다 할 희망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고광률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지는 싸움에 온몸을 던지는 ‘바보’들이다.

소설가 고광률
소설가 고광률

표제작인 단편 ‘복만이의 화물차’에서 이십년째 시간강사로 전전하는 화자 ‘나’는 방학이면 막노동과 대리운전도 마다 않는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을 손님으로 태우고 호텔로 가야 했던 일에 자괴감을 느낀 그는 “신념이 밥을 당해내지는 못했다”며 마침내 ‘매필’(賣筆)을 결심한다. 삼류 부자의 자서전 대필을 맡기로 한 것. 제 신념과 배치되는 졸부의 행적과 세계관을 그럴듯한 말로 치장해야 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복만의 사정이 그를 더 괴롭힌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잘리고 화물차 운전으로 업종을 바꾸려 하는데, 그나마 산재보상으로 받은 이천만원은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위자료로 주었다는 것. 투사인 복만을 자랑스러워하고 받들었으나 “세상이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말과 생각을 바꾼” 복만의 아내가 화자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은 소설 말미에서야 드러나 두 사람의 고통과 비극을 한층 부각시킨다.

중편 ‘밥’의 주인공은 노동운동에 청춘을 바치고서 마흔다섯 늦은 나이에 홍보 및 기획 회사를 차린 인물이다. “내가 핏대를 세우며 싸웠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깍듯이 모셔야 할 클라이언트가 되었다.” 구멍가게 규모인 회사의 운영도 여의치 않은데, 그는 엉뚱한 싸움에 끼어든다. 아침 산책길에서 불법 분묘 조성 현장을 목격하고 당국에 제보하지만, 묘주인 문중의 표를 의식한 구청장과 공무원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 분묘 조성을 위한 소형 굴삭기의 작업 너머로 “멀리 대형 굴삭기가 삽날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하천 바닥을 헤집는” 장면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문중 묘 조성을 위해 산림을 훼손하는 소악(小惡)은 사대강 사업으로 대표되는 거악(巨惡)의 분신이요 축소판이라는 것.

소설가 고광률
소설가 고광률

분량이 가장 긴 중편 ‘영춘’(迎春)은 대학 신문사의 편집간사인 승경과 사업 실패 뒤 사채업 수금원에 쫓기는 친구 영춘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사소한 회계 처리 때문에 교육부의 감사를 받게 된 승경의 처지도 답답하지만,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가족에게도 외면 당하는 영춘의 현실은 가긍하기 짝이 없다. 그런 영춘을 보며 승경은 “패자부활전이 없는 나라에서 지금 고꾸라지면 나도 영춘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는 교훈(?)을 챙기지만, 마지막까지도 자신이 데리고 있던 조선족 노동자들을 챙기는 영춘의 모습은 그에게 죄책감을 안겨준다.

최재봉 기자, 사진 고광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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