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 등 프·미 경제학자 5명
70여개국 분배국민계정 만들어
“30년새 소득·자산 불평등 커졌다
누진세·좋은일자리·미래 투자를”
70여개국 분배국민계정 만들어
“30년새 소득·자산 불평등 커졌다
누진세·좋은일자리·미래 투자를”
〈세계불평등보고서 2018〉
파쿤도 알바레도·뤼카 샹셀·토마 피케티·이매뉴얼 사에즈·게이브리얼 주크먼 지음, 장경덕 옮김/글항아리·2만2000원
1991년 초 미국이 걸프전쟁에서 이라크를 초토화하고 승리한 직후,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지율은 89%로 치솟았다. 갤럽 여론조사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고, 이듬해 대선에서 재선은 ‘따 놓은 당상’ 같았다. 앞서 로널드 레이건의 재임(1980~1988)에 이어 공화당의 4연속 16년 집권의 꿈을 허문 결정적 한 방은 경기 침체의 빈 틈을 파고 든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 캠프의 짧고 강렬한 선거 구호였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그러나, 미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는 20세기 이후 급속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해왔다. 1980년대 들어선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의 급성장이 힘을 보탰다. 문제는 세계 전역에서 경제성장의 과실이 소수 부유층에 쏠리는 ‘분배의 불균형’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선거에서 마법의 주문은 이렇게 바뀌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바보야, 문제는 분배야!”
‘빈익빈 부익부’ 추세는 198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미국의 레이거니즘과 영국의 대처리즘이 쌍끌이로 주도한 규제완화와 시장 자유화, 자본시장 개방의 확산, 즉 신자유주의 경제의 세계화와 궤를 같이한다.
<21세기 자본>으로 유명한 토마 피케티(파리경제대학 교수)를 비롯해 프랑스와 미국 경제학자 5명이 함께 쓴 <세계불평등보고서 2018>이 우리말 번역본으로 나왔다. 임금 및 자산 소득의 격차, 다시 말해 경제적 불평등이 전 세계의 국경 안팎에서 공통으로 진행돼 온 실태를 경제 데이터로 실증하고 그 원인과 대안을 제시한다. 글로벌 소득분배 공동연구 프로젝트인 ‘세계불평등 데이터베이스(WID, https://wid.world)’에 참여하는 5개 대륙 70여개국 100여 명의 학자들이 수집, 생산한 자료를 ‘일관되고 체계적인’ 통계 기준으로 조정, 정리한 성과물이다. 앞서 이 연구 네트워크는 지난해 12월 이번 책에 담긴 핵심 내용을 공식 발표한 바 있으며, 올해 4월에는 프랑스어로 단행본 초판을 발간했다.
보고서가 크게 소득불평등과 자산불평등으로 나누어 보여주는 세계 불평등 실태는 우울한 짐작보다 더 심각하다.
소득 불평등의 경우, 1980년 이후 30년 가까이 세계 하위 50%의 소득이 제자리걸음을 치면서, 상위 1%와의 소득 격차도 당시 27배에서 지금은 81배까지 벌어졌다. 다시 말해 불평등은 거침없이 심화돼 왔다. 소득 불평등의 확대는 상속, 배당, 임금 격차 등으로 생긴 자산 불평등을 만회할 기회가 갈수록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득 불평등은 세계 전역의 현상이지만 그 양상에선 국가·지역별로 편차를 보였다. 2016년 기준 전체 국민소득에서 상위 10%의 몫을 보면, 유럽이 37%로 가장 낮은 반면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지역”인 중동에선 61%에 이르렀다. 한국은 이번 보고서에 포함돼 있지 않은데, 데이터베이스 누리집에 있는 자료를 보면 44.9%(2012년)로 중하위 수준이었다.
소득 불평등 추세는 특히 서유럽과 미국이 극단적으로 갈렸다. 1980년에는 두 지역 모두 상위 1%가 전체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10%로 비슷했는데, 2016년에는 서유럽이 12%로 소폭 늘어난 반면 미국에선 20%로 치솟았다. 같은 기간 미국의 하위 50% 계층의 소득은 20%에서 13%로 크게 줄었다. 가난한 절반 사람의 몫이 고스란히 최상위 1%에게로 옮겨간 셈이다.
이번 보고서는 지역, 세대, 성별 간 소득 격차에도 주목했다. 도시-농촌 소득 격차야 오래된 이야기지만, “부자 동네와 못사는 동네의 공간적 분리”도 문제가 된다. 비싼 도시 거주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변두리로 밀려나는데, “통근 시간이 길수록 사회적 사다리를 올라갈 기회는 감소하며, (…) 저소득 가구의 고립과 통근의 어려움이 사회적 이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남녀간 노동소득 불평등은 1.75대 1(2014년)로, 격차가 꾸준히 좁혀져왔다. 그러나 최상위 구간으로 갈수록 유리천장은 여전히 견고하다. 상위 1% 내에서는 남성이 85%를 차지하며, 상위 0.1% 안에서는 남성이 89%다. 즉 1999년 이후 노동소득 상위 집단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조금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세대 격차 문제도 비관적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경제적 상향 이동 가능성이 과거보다 훨씬 줄었을 뿐 아니라, 위 세대와는 전혀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다. 부동산 가격 급등이 새로운 형태의 불평등을 빚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부동산을 적절한 시기에 구입했거나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은 이들과 세입자로 출발한 이들 사이의 불평등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다.
소득 불평등도 문제지만, 자산 불평등은 더 심하고 위태롭다. 중국·미국·유럽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자산은 상위 10% 계층이 전체의 70%를 차지(2017년)하고 있다. 가장 부유한 1%로 범위를 좁히면 33%로 집중도가 더 높아진다. 부자 상위 10% 안에서조차도 부(富)의 편중이 도드라진다. 미국의 경우 상위 1%의 자산 소유 비중은 1980년 22%에서 2014년 39%로 급증했다. 미국인 100명 중 1명이 미국 전체 자산의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자본주의 체제 이행에 따라 최상위 부유층의 몫이 최근 20년 새 각각 15%→30%, 22%→43%로 곱절이나 늘었다.
거센 민영화 바람, 즉 공공자본의 축소와 민간자본의 확대는 자산 격차를 부채질한다. 1980년 이후 대다수 나라에서 국민소득 대비 민간부문 순자산 비율이 늘어온 반면, 공공부문 자산은 감소 추세였다. 심지어 최근 미국과 영국에선 공공부문 순자산(자산에서 부채를 뺀 값)이 마이너스가 됐고, 일본·독일·프랑스에서도 겨우 플러스를 유지했다. “이는 정부가 경제를 규제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며 불평등을 완화하는 능력을 제한한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하지만 아직 파국을 맞은 건 아니며, 여전히 선택지는 남아 있다. 지은이들은 무엇보다 상위층의 부의 집중을 막는 데 누진세 강화가 효과적이라는 게 증명됐다며 글로벌 차원에서의 조세 정책 전환을 촉구한다. 또 하위 계층에서의 해법으론 교육과 괜찮은 일자리에 대한 더 평등한 기회 부여를 강조했다. 탈세와 재산 은닉을 막기 위한 글로벌 금융등록제, 공공자산 확충과 부채 경감 등 미래에 대한 투자도 시급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오늘날 자유시장경제와 금융자본주의의 본산이자 그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의 유력 정치인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민주당)은 최근 대기업의 공공 관리를 규정한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을 발의했다. 연 수입 10억달러가 넘는 모든 기업의 연방법인 인가제, 노동자 경영권 및 정치헌금 규제 강화, 경영자 보수 제한 등이 뼈대다. ‘헬조선’, ‘삼성 공화국’이란 자조가 나오는 한국사회에도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까?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 ‘불평등 측정’ 어떻게 했나 감춰진 최상위 소득, 과세·자산 통계로 찾아냈다
2014년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지난 300년 간 미국과 유럽 20개국의 소득과 부의 분배 데이터를 분석한 뒤 현 추세라면 경제적 불평등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연평균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고 자본소득이 임금소득을 웃도는 까닭에, 소득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성장론과 시장주의를 강조하는 경제학계와 재계 일부에선 통계 데이터의 오류와 부적절한 통계 해석 등을 주장하는 비판이 일었다. 자본소득은 소유자가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한 결과라는 반론은 그나마 경제학적이다. ‘분배가 불평등하더라도 내 삶이 이전보다 나아졌다면 뭐가 문제냐’는 반박도 나왔다.
이번 <세계불평등보고서 2018>의 저자들도 “경제적 불평등은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으며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현상”이란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적절히 대응하지 않는다면 심화되는 불평등이 온갖 정치적·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 (…) 그 재앙들을 피하는 일은 불평등을 주의 깊게 감시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은이들이 이번 책에서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 월드 프로젝트가 경제적 불평등을 측정한 방식과 의의를 밝힌 것도 그래서다.
지은이들은 먼저, 기존의 ‘공식적인’ 불평등 측정치는 대부분 조사 대상자가 자신의 소득과 부를 스스로 밝히는 면접조사에 의존하는 한계를 지적한다. “지난 몇십년 동안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최상위 소득과 자산 수준을 심하게 과소평가”한다는 것. 이런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자료 조사자들은 역외자산 추정치를 포함한 국가 전체 소득과 자산 통계, 소득세·상속세·부유세·재산세 등 과세자료, 가계소득과 재산 순위 자료 등 신뢰할 만한 다른 유형의 시계열 자료들을 활용했다. 또 그렇게 수집된 자료들을 일관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결합하는 ‘분배국민계정’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번 보고서는 “세계적 차원의 자산 불평등 데이터를 만들기 위한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데이터베이스 홈페이지(https://wid.world)에선 이 책의 요약본을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 아랍어, 힌두어, 중국어 등 8개 언어로 무료로 내려받고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 피디에프(pdf) 300쪽 분량의 보고서 전문(영어)도 마찬가지다. 지은이들은 이번 2018년판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지속적인 자료 업데이트와 연구 대상의 지리적, 시간적 범위를 넓혀 계속 개정판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일준 기자
파쿤도 알바레도·뤼카 샹셀·토마 피케티·이매뉴얼 사에즈·게이브리얼 주크먼 지음, 장경덕 옮김/글항아리·2만2000원
2011년 9월 미국 뉴욕의 금융 중심지 월스트리트에서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금융자본의 탐욕에 항의해 벌어진 ‘오큐파이(점령하라) 운동’에 참가한 한 시민이 “우리가 99%다”라는 구호를 적은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2011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시민들이 “우리는 99%(의 시민)와 함께한다”며 오큐파이 시위를 하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 뉴욕의 중심가 브로드웨이를 지나던 여성 시민이 노숙인에게 먹을 것을 건네주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 ‘불평등 측정’ 어떻게 했나 감춰진 최상위 소득, 과세·자산 통계로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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