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에 소개된 보로로족의 장례식 모습. 그들의 삶과 문화를 어찌 ‘미개하다’고 말할 것이며, 어찌 ‘야만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들 삶은 서구에 의해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이 되어 파괴되어 버리고 ‘문명화’ 또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변형돼버렸다. 사진 한길사 펴냄 <슬픈 열대> 중에서
열대 내 부족 삶과 문화 찾아 떠난 여행기
먹거리 모자라도 가축과 함께 나누고
족장은 권력 휘두르는 대신
솔선수범으로 지도력 인정받는 세계
어찌 미개한가
고전 다시읽기/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열대’라는 단어 앞의 ‘슬픈‘이란 형용사가 인상적인 이 책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1935년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에 사회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된 여행의 기록이다. 이후 약 20년이 지난 뒤 쓰인 이 책은, “모닝 빵처럼 팔렸다”는 말로 묘사되는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면서 그를 대중적인 스타 지식인으로 만들어준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그는 박사학위 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로 프랑스 사상계의 새로운 거목으로 떠올랐으며, ’구조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을 창안했다. 이어 <슬픈 열대>, <야생의 사고> 등 저작을 통해 그는 프랑스 사상계 전반을 뒤바꿔놓은 중심인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이 주도하고 있던 유럽의 철학적 주도권을 프랑스로 이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래서인지 구조주의라면 “한물간 지 오래”인 1990년대 중반인가에 프랑스의 문화 관련 기자들의 투표에서 여전히 ’가장 존경하는 사상가‘ 1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행은 다른 세계, 내게 익숙하지 않은 세계와의 만남이다. 그래서 문학도, 영화도 여행자를 좋아한다. 오디세우스의 여행, 파우스트의 여행, 혹은 손오공의 여행, 레인맨의 여행 등등. 거기서 작가는 여행자를 따라가면서 그가 다른 세계와 만나며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삶을 향해 떠나자고 슬며시 우리를 부추긴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레비스트로스의 이 여행기도 그렇다. 그가 정말 여행을 싫어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의 여행은 뜻밖의 전화 한 통으로 인해 떼밀리듯 시작된, 그래서 더 운명처럼 여겨지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어쩌면 그 전화를 받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역사학이 자기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간을 여행하고 탐사하는 것이라면, 그가 좋아하게 되었던 인류학은 다른 공간을 여행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탐사하고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레비스트로스는 다른 종류의 인류학자여서, 현지조사보다는 수많은 조사자료들을 비교하고 교차시켜 다양한 문화나 신화들 안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된 것(그가 ‘구조’라고 부르는 것)을 찾고자 했다. ‘구조주의’란 한편으론 구조주의 언어학을 연구방법으로 삼아서 생긴 이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바로 이 공통된 것을 찾고자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 주도권 독일서 프랑스로
그렇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단지 책상에서 남이 쓴 글을 보며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만은 아니었음을 본다. 또한 모든 문화에 공통된 것만을 찾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음을 또한 본다. 이 여행기의 줄기는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의 삶과 문화다. 그것을 천천히 거쳐가면서 그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다른 종류의 삶을 체험한다. 그림 그리길 즐기는 카두베오족의 문신과 문양에서 주어진 신체, 주어진 얼굴을 변형시키는 예술가적 창조의 욕망을 본다. 남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나누는 남비콰라족의 사랑법에서 오히려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서적이고 유희적인 쾌락의 감각을 보기도 하고, 그 대담한 사랑의 와중에도 발기된 흥분으로 빠져들지 않는 태도에서 육체의 노출이 아니라 평정의 상실을 부끄럽게 여기는 고상한(?) 윤리감각을 발견하기도 한다. 혹은 인간의 형체란 물고기 형체와 앵무새 형체 사이의 과도기라고 보는 보로로족의 윤회적 우주관에서 인간과 동물 세계의 연속성을 보기도 하며, 가축에게도 인간과 동등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먹을 것이 부족해도 ‘함께 식사하는’ 남비콰라족의 태도에서 그러한 연속성이 함축하는 실제적인 의미를 보기도 한다. 또 고유명사를 감추고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남비콰라족 사람들에게서 문자 없는 세계에 대한 루소적 꿈을 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이 사용하는 문자를 흉내내 주민들을 설득하거나 ‘지배’하려는 한 추장의 태도를 보면서 문자의 짝이 권력임을 보기도 한다. 좀더 인상적인 것은 추장에 관한 정치학이다. 가령 남비콰라족의 경우 추장은 유랑생활을 편성하고 여정을 선정하며 숙영할 곳을 정하는 지도자다. 그러나 그에게는 강제를 수반하는 권력은커녕 공적으로 인정된 권한도 없다. 그는 오직 대중의 호감이나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조달해줄 능력, 혹은 솔선수범하는 능력에 의해서만 추장의 지도력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추장의 지도력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관대함’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정보제공자이기도 한 남비콰라의 추장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지만, 그것은 어느새 다른 주민들 손으로 넘겨졌음을 발견한다. 다른것 동질화 목격 깊은 슬픔 이러한 삶과 문화를 어찌 ‘미개하다’고 말할 것이며, 어찌 ‘야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서구인들에 의해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이 되어 파괴되어 버렸고 ‘문명화’ 내지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동일한 양상으로 변형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안다. 럼주 한잔의 미묘한 맛은 거기에 섞여 들어간 불순물 때문임을. 사람들의 삶에서 이질적인 것, ‘불순물’을 제거해버리려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제공하는 것들을 스스로 완전히 파괴해버리려고 하는 것”임을.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비난하고 이질적인 모든 것을 자신의 모습대로 동질화해버리는 서구문명에 대해, 바로 자기 자신이 속한 그 세계에 대해 거대한 분노를 느끼며, 그것으로 파괴된 열대의 세계에서 깊은 슬픔을 느낀다. 틀림없이 그의 여행은 이 침략과 파괴에 의해 말살당한 흔적을 목격하고 체험해야 하는 여행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여행기에는 또한 깊은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 책의 제목을 ‘슬픈 열대’라고 붙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무척 좋아한다. 이 책 속에 배어 있는 그 따뜻한 마음을, ‘야만인’에 대한, 자기와 다른 종류의 삶에 대한 애정을 깊이 사랑한다. 데리다의 비판처럼 원시적인 것에 대한 향수나 구조주의적 방법에 문제가 있음은 사실이지만, 몽상이나 향수마저 지울 수 없었던 그 따뜻한 안타까움을, 그 깊은 슬픔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비판은 너무 쉽고도 안전한 투자 같아서 싫다. 슬픔과 분노를 안고 그는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돌아가는 곳은 또 다른 원시의 열대도, 그가 속했던 문명화된 대륙도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 모두가 서로에 기대어 있는 세계다. “역사, 정치, 사회적·경제적 세계, 물리적 세계, 심지어 하늘까지, 이 모든 것들이 동심원을 이루며 나를 둘러싸고 있다.” 여행의 끝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당신이 신이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자기 몸에서 빛이 난다는 것을 느끼거나 기적을 행할 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가 아니라 야생의 짐승들이 가까이 다가와도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고, 그 온몸을 엎고 있는 악취나 분뇨에서도 예사로워질 때랍니다. 모든 시체, 모든 부패물, 분비물이 다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때랍니다. 신이 되고 나면 나비들이 당신 목덜미에 앉아서 교미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의 마지막은, 그 ‘귀로’의 끝은 미얀마의 챠웅(불교사원)이다. 외부, 타자, 이질적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획일적 문명, 혹은 그것의 좀더 남성적이고 호전적 형태인 이슬람에서 더 없는 불편함을 느끼는 그는 여성적이거나 탈성화된 불교에서, 외부의 이질적인 것에 열려 있는 불교에서, 그것과 만남을 통해 기독교적 문명이 여성화되는 것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기독교의 서구와 불교의 인도 사이에 발생한 남성적 이슬람으로 인해 이미 오래전에 절단된 것이다. 귀로의 끝은 ‘열려있는’ 불교사원
이진경/서울산업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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