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발간된 ‘로력자의 고향’ 1호 앞표지(왼쪽)과 뒤표지.
일제강점기 연해주로 망명한 조선인들이 한글로 발행한 문예지 <로력자의 고향>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 잡지는 소설 ‘낙동강’의 작가 포석 조명희(1894~1938)가 주도해 1934년 9월 하바롭스크에서 1호가 나왔으며 1937년 8월 2호가 나왔다.
국문학자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최근 모스크바 러시아 중앙도서관에서 확인한 <로력자의 고향> 창간호를 3일 <한겨레>에 공개했다. 120여쪽 부피인 이 잡지에는 조명희의 시 ‘시월의 노래’를 비롯해 한아나톨리, 전동혁, 최호림 등 연해주 조선인 문인들의 시와 산문, 희곡, 소설 등이 다채롭게 들어 있다. <로력자의 고향>이라는 문예지가 발행됐던 사실은 그간 알려져 있었지만 실물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재용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와 중국, 일본 등지로 삶의 터전을 옮겼지만, ‘망명 문단’이 형성된 곳은 연해주가 유일하다”며 “<로력자의 고향>은 오늘날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는 디아스포라 문학의 효시로서도 문학사적 의미가 막대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로력자의 고향> 말고도 당시 연해주에서 발행된 교과서와 단행본, 당 선전물 등 수백 종의 한글 책자를 러시아 중앙도서관에서 확인했다. 사서 말로는 당시에도 납본 제도 같은 게 있어서 연해주에서 나온 출판물을 모스크바로 보냈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며 “이처럼 몇백권에 이르는 한글 출판물의 존재는 <로력자의 고향>으로 집약된 망명 조선인 문단의 물적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손이 망치를 잡앗고,/ 우리의 발은 박휘를 굴린다./ 우리의 엇개엔 총이 메어있고,/ 우리의 머리 우엔 새 태양과 한가지 과학이 빛난다./ 이리하여 우리의 건설은 쉬일날이 없고,/ 우리의 무장은 원수를 물리치고야 만다./ 망치여, 더힘있게 내려치라! 박휘여, 더 빨리 굴르라!/ 태양이여, 더 빛나게 내려쪼이라!/ 우리의 걸음은 한시가 급하고, 우리의 팔다리엔 힘줄이 뛴다/ 오즉? “앞으루!!” “앞으루!!””(‘십월의 놀애’ 마지막 연)
<로력자의 고향>에 실린 조명희의 시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전 세계 노동자의 ‘조국’으로 대두한 소련의 창창한 미래를 기약하고 그에 복무하고자 하는 굳센 의지를 밝히는 내용들이다. “우리의 모국 쏘베트 공화국”(‘십월의 놀애’)이라는 구절은 소련 연해주에서 발행되는 조선 망명 문인들의 잡지 이름이 ‘로력자의 고향’이 된 까닭을 설명해 준다.
“국경의 산이 문어지는 한이있어보아라/ 우리의 손에 총이 잡아진 날까지는,/ 우리의 피줄이 움직이고 있는날까지는/ 원수의 발이 우리 땅을 밟을수 있으랴?/ 원수의 화약 냄새가 우리 땅에서 맡아질수 있으랴?/ 산아, 너도 이조국의 국경을 직히어다고!// 맹서하고 나선맘! 맹서하고 나선맘!/ 해를 두고 맹서하여 나섯노니/ 원수야, 올려먼 오라!/ 나의 맹서를 받으라?나의 총알을 받으라!”(조명희 ‘맹서하고 나아서자’ 뒷부분)
일본으로 대표되는 ‘원수’에 맞서 ‘조국’ 소비에트를 지키기 위해 싸우겠노라 맹세했던 조명희는 그러나 1938년 일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총살 당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연해주 조선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에 이어 조명희의 처형으로 연해주 망명 문단은 뿌리째 뽑히고 만다. 김 교수는 “조명희뿐만 아니라 <로력자의 고향> 창간호에 참여했던 문인들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숙청 당했다”며 “엄청난 잠재력을 지녔던 망명 조선어 문단의 싹이 강제 이주로 잘린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 필자로 이름을 올린 13명 가운데 전동혁과 강태수 두 사람만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것으로 확인된다”며 “강태수는 1956년 조명희가 복권될 때 그에 관해 긍정적인 글을 썼고, 전동혁은 해방 뒤 북한으로 가서 러시아문학 번역 작업을 했는데 그 일을 나중에 백석이 이어 받았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흥미로운 인물”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로력자의 고향> 2호 중 조명희가 이 책 1호에 실린 한아나톨리의 시들을 칭찬하고 최호림의 작품은 비판한 글 등은 나중에 북한에서 다시 출판이 되었지만 그 외에 어떤 글들이 실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연해주 망명 문단의 전모를 확인해 문학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로력자의 고향> 2호를 확인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겠다”고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