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이대흠 지음/창비·8000원
이대흠(사진)의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좋은 시가 많지만, 그중 흥겨운 시를 들라면 ‘늦가을 들녘’을 꼽겠다.
“널펑네 양반 돼지 한마리 팔고 오는 길에/ 젤 먼저 국밥집 들러 막걸리 두되 마시고 현찰로 줘불고/ 밀린 술값까지 탈탈 털어 쥐알려불고/ 내친 짐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종재기골 양반네 막걸리값까지 개러불고/ 종묘상 들러 고추 모종값 갚어불고/(…)”
이렇게 시작하는 시다. 널펑네 양반이 돼지를 팔아 생긴 돈으로 자신의 밀린 외상값을 갚는 것은 물론 남의 술값까지 대납하고, 손녀와 처삼촌의 선물과 이바지로 한껏 기분을 내며 “풍로 바람에 검불 날리대끼 다 까묵어불고/ 마침내 차표 한장 딸랑 바까서는/ 빙골로/ 빙골로 돌아가는 저 늦가을 들녘”의 정경을 눈에 선하게 보여준다.
널펑네 양반이 호기롭게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 모습은 “~불고”(~버리고)라는 보조동사를 거느린 다양한 동사들로 표현되는데, 하나같이 ‘갚다’ 또는 ‘(비용을)치르다’라는 뜻으로 새겨지는 이 말들은 한국어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한껏 과시한다. ‘지와불고’ ‘죽에불고’ ‘볼라불라다가’ ‘잉끼레불고’ ‘풀어불고’ ‘털어불고’로 이어지는 시행들은 왠지 어깨춤이라도 춰야 할 것 같은 리듬감을 조성하며, 널펑네 양반이 모처럼 만끽하는 무절제와 탕진의 카니발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늦가을 들녘’에서도 시의 흥겨운 리듬감을 북돋는 사투리의 구실은 톡톡하거니와, 시인의 고향 장흥을 제목 삼은 시는 말과 삶의 긴밀한 조응을 실감나게 알려준다.
“장흥에서 조금 살다보면 누구든지/ 장흥 사람들이 장흥을/ 자응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응에 아조 뿌리를 내리면/ 장서 나서/ 장서 자라고/ 장가 있는 장고나/ 장여고를 나온 토백이가 된다// 장흥에서 자응으로 가는 데는/ 십년이 족히 걸리고/ 자응에서 또 자앙, 장으로 가는 데는/ 다시 몇십년이 걸린다”(‘장흥’ 부분)
‘자응가’ 또는 ‘장가’라는 말이 ‘장흥에’를 뜻한다는 것을 알기에는 다시 더 긴 세월이 필요하다는데, 그 세월에 진력이 나는 이라면 칠량 옹기쟁이의 말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겠다. “잿물이라먼 그래도 한 삼 년은 푹 삭어사써 그런 잿물로 그륵을 궈사 색에 뿌리가 생기제// 사람도 그란 것이여”(‘칠량에서 만난 옹구쟁이’ 부분).
오래 객지를 떠돌다 쉰 넘어 제주 바닷가에 집 한 채를 장만해 늙은 부모님을 모셔 온 홀아비 만수 형님. 부모님을 화물차에 태워 며칠 구경을 시켜 드리던 어느 날 밤 잠결에 이런 소리를 듣는다.
“꿈결인 듯 아닌 듯 파도 소리가 막 들려오더래요 처음엔 파도가 파도를 베끼는 소린 줄 알았다가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는 소린 줄 알았는데요 알고 보니 몸이 몸을 읽어가는 소리였는데요 칠십 줄 넘은 노인들이 한 오십년 읽어왔던 서로의 몸을 다시 읽는 소리였는데요”(‘성스러운 밤’ 부분)
“우주가 알 스는 소리”라고 시인은 그 소리를 옮겼으니, 과연 성스러운 밤이로고.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천관’)는 시인의 항심이 듬직하다.
최재봉 기자, 사진 이대흠 시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