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한미화의 어린이책 스테디셀러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시공주니어(2004) 어릴 때 읽었던 명작을 다시 만나면 적잖이 놀란다.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품이 전혀 다른 메시지를 품고 있어서다. 귀에 익숙한 소공자, 소공녀 같은 말들이 일본어 중역으로 생겨난 국적불명의 표현임을 알게 되면 또 놀란다. 소공자란 말은 미국의 여성작가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의 ‘Little Lord Fauntleroy’를 소공자(小公子)로 번역한 일본식 한자 표현을 우리가 그대로 사용하며 굳어진 말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소공자 대신 ‘세드릭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여성작가 버넷이 <세드릭 이야기>를 발표한 것은 1886년이다. 이후 <세라 이야기>(소공녀)와 <비밀의 화원>을 선보였고, 이 작품들은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만들어지며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세드릭 이야기>는 평범한 미국 소년이 갑자기 영국 백작 가문의 후계자가 된다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행운이 굴러들어온다는 설정은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패턴이다. 이때 주인공은 힘든 환경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세드릭 역시 비슷하다. 부모에게 넘치는 사랑과 보살핌을 받은 세드릭은 상냥하고 순수하고 모든 이를 따뜻하게 대한다. 붙임성도 좋아서 누구든지 세드릭을 보면 즐겁게 말을 걸고 인사를 한다. 세드릭은 모든 사람의 친구였다. 작가는 세드릭의 훌륭한 품성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흥미로워지는 건 도린코트 백작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세드릭의 할아버지인 백작은 손자와 정반대다.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평생 자기만 생각한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미국인 며느리가 낳은 손자를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자 별 수 없이 세드릭을 가문의 후계자로 불러들인다. 백작은 지위와 재산을 뽐내려고 부러 손자에게 돈으로 선심을 쓴다. 그런데 세드릭은 백작이 준 돈으로 가난한 이웃과 친구를 돕고 기쁜 나머지 할아버지는 훌륭하고 모두에게 친절하며 자신도 장차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세드릭의 믿음은 기적을 만들어낸다. 평생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던 백작은 세드릭의 믿음을 지켜주고자 가난한 사람들을 돕게 되고 이런 행동은 괴팍한 백작의 성품과 삶마저 바꾼다. 사람은 고귀해질 수 있을까. <세드릭 이야기>는 백작처럼 고약한 이도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고귀함이란 수업시간에 배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한 사람을 고귀함으로 이끄는 건 역설적이게도 사람이다. 곤궁한 이들을 보살피고, 크고 작은 좌절감을 감내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의 삶은 변한다. 사람을 고귀함으로 이끄는 것은 사람인 것이다. 초등 5~6학년. 한미화 출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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