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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열아홉 첫사랑, 단 하나의 이야기가 되다

등록 2018-09-06 20:37수정 2018-09-07 15:17

줄리언 반스 소설 ‘연애의 기억’
열아홉 청년과 엄마뻘 여성 이야기
작가 자신의 경험 담은 ‘자전소설’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다산책방·1만5000원

“나는 열아홉이었고, 나는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과 퇴색에 내력이 있다고 믿었다.”

첫사랑은 풋풋한 만큼 서투르다. 순수하지만 잔인하기도 하다. 첫사랑은 오래 기억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름답게 채색되고 거짓으로 각색되기도 한다. 첫사랑은 그렇게 이야기가 된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연애의 기억>은 이야기로 몸을 바꾼 첫사랑의 기억을 다룬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으며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라는, 주인공 수전의 말에서 원제(‘The Only Story’)가 왔다. 수전이 말하는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꼭 첫사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파트너였던 열아홉 청년 폴에게 그것은 역시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그의 경우에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렸다.

엄살이거나 과장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폴과 수전의 사랑은 그만큼 특별하고 이채로웠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폴이 방학 동안 다닌 동네 테니스 클럽에서 수전을 만났을 때 수전의 나이는 48살. 어머니뻘이었다. 이 파격적인 커플의 십여년에 걸친 사랑 이야기가 <연애의 기억>을 이룬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소설의 첫 두 문장은 어쩐지 카뮈의 <시지프 신화> 속 저 유명한 도입부를 떠오르게 한다.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말하자면 폴에게 사랑과 고통의 상관관계는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치명적 질문에 육박하는, 이념적 무게를 지니는 것이다. 폴의 이념은 물론,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는 쪽이었다.

서른살 가까이 어린 청년의 사랑을 얻었다고 해서 수전을 ‘요부’쯤으로 짐작해서는 곤란하다. 폴 또래인 딸 둘을 둔 유부녀임에도 수전은 폴과 비슷하게 육체적 사랑에 미숙했다. 폴이 수전에게서 본 것은 오히려 ‘젊음’과 유쾌함이었다. 수전은 “삶에 웃음을 터뜨”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다 닳아버린 세대야”라는 말이, 자기 세대의 뻔뻔함과 비속함에 거리를 두는 수전의 ‘젊음’을 알게 한다면, 제 남편이 열중하는 골프를 두고 “정지해 있는 공을 치는 것은 명백히 정정당당하지 못한 일”이라 말하는 데에서는 그의 유머감각이 엿보인다.

열아홉살 청년과 엄마뻘 여성의 사랑을 다룬 소설 <연애의 기억>의 작가 줄리언 반스. 작가 자신이 젊은 시절 경험한 비슷한 형태의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 Alan Edwards
열아홉살 청년과 엄마뻘 여성의 사랑을 다룬 소설 <연애의 기억>의 작가 줄리언 반스. 작가 자신이 젊은 시절 경험한 비슷한 형태의 사랑을 소재로 삼았다. ⓒ Alan Edwards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인칭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연애의 기억>은 크게 세 장으로 나뉜다. 1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폴의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것과 달리, 2장은 일인칭으로 시작했다가 슬그머니 이인칭으로 옮겨 가고, 3장은 삼인칭으로 시종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일인칭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다시 삼인칭으로 시점이 확산·이동하는 형식을 지닌다. 그렇다는 것은 폴의 근시안적 자기중심주의가 상대화를 거쳐 객관적 시야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시점의 이동은 어조의 변모와 깍지를 낀다. 소설 앞부분에서 비교적 경쾌하고 씩씩하게 내달리던 문장들은 뒤로 갈수록 무겁게 가라앉는다. 주로 방학을 이용해 사랑을 나누던 폴과 수전은 결국 런던에 집을 얻어 동거에 들어가지만, 수전이 갈수록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은 재난이 되었다.” “그의 사랑은 사라졌다, 쫓겨나버렸다, 달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시간과 퇴색 앞에 자신만만했던 폴은 그제서야 자신의 과오에 눈을 뜨게 된다. “그녀가 너보다 잃을 게 많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녀를 데려옴으로써 그녀를 더 고립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폴이 제 아무리 일인칭에서 이인칭으로 삼인칭으로 널뛰기를 한다 해도, 옮긴이 정영목이 지적한 대로, 이 이야기에 “또 한 사람의 이야기는 텅 비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라는 원제를,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한 사람만의 이야기’로 새겨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른 한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폴도, 뒤늦게, 궁금해한다. 가령, “그녀는 오르가슴을 몇 번 느꼈을까? 사실, 한 번이라도 느꼈을까? 쾌감과 친밀감은 있었다, 분명히. 하지만 오르가슴은? 당시에 그는 알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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