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냉혈한들의 시대에 슬픔 공부로 맞서다

등록 2018-09-20 21:34수정 2018-09-20 21:52

믿고 읽는 문학평론가 신형철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지난 10년의 슬픔과 분노 절절
미문에 실린 ‘정확한 칭찬’도 돋봬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한겨레출판·1만6000원

믿고 읽는 신형철이다. 10년 전에 낸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에서부터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2011)를 거쳐 영화 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에 이르기까지, 신형철의 책들이 독자를 실망시키는 법은 없었다.

신뢰할 만한 문학적 안목, 탄탄한 지적 배경, 정확한 분석과 타고난 공감 능력, 사려깊고 겸손한 태도, 섬세하고 단단하며 아름다운 문장… 이런 미덕을 두루 갖춘 그의 평론과 산문은 문단 안팎에 굳건한 팬덤을 구축했다. 특정 작가나 작품에 관한 그의 판단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일지라도 그의 문장을 읽는 기쁨과 보람에 차질이 생기지는 않았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첫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로부터 7년 만에 내는 두번째 산문집이다. 제목에 주목해 본다면, ‘느낌에서 슬픔으로’ 옮겨온 7년이라고 할까. 그런 변모의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여기 실린 글들은 2010년에서 올 초까지 쓴 것들인데, 그 시기는 ‘이명박근혜’로 대표되는 사회적 폭력과 상처의 날들과 거의 포개진다. 머리말에 따르면 여기에다 지은이의 개인적 아픔도 더해져 슬픔을 더욱 천착하게 되었다고. “이제부터 내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슬픔에 대한 공부가 다시 슬픈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느낌의 공동체>의 표지와 이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표지는 같은 화가의 그림이다. 그런데 신형철은 <느낌…>의 표지를 정할 때 “그림 속의 배를 어떤 당신과 함께 타고 있다고 여겼”다면, <슬픔…>의 표지는 “내가 이르지 못할 슬픔을 가졌을 당신의 뒷모습을 그림 밖에 서서 바라”보는 심정을 담았다고 밝힌다. 표지 그림에 관한 이런 언급에 이어,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거나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을 좋아한다는 고백이 따른다.

신형철이 하필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와 그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은 지난 10년 가까운 세월이 타인의 슬픔에 유독 무심하고 잔인한 시간이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세월호 희생자들)이 죽어가는 동안 행방불명 상태였고 이후에도 유가족을 철저하게 외면한 한 냉혈한”, “광화문에서 단식 중이던 세월호참사 유가족 앞에서 피자를 시켜 먹는 이들”, 그리고 “타인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슬픔 공부의 필요성과 어려움을 절감하게 한다.

<느낌의 공동체> 이후 7년 만에 두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낸 문학평론가 신형철 조선대 교수. “요즘 나는 어쩌면 이제 이 세계 자체가 문학에 적대적인 곳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과 싸우고 있다”고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느낌의 공동체> 이후 7년 만에 두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낸 문학평론가 신형철 조선대 교수. “요즘 나는 어쩌면 이제 이 세계 자체가 문학에 적대적인 곳으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과 싸우고 있다”고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른바 ‘폭식 투쟁’을 벌인 이들을 “절멸시켜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밝힐 때, 천안함 사태에 북이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없는데도 북에 대한 응징을 주장한 중견 시인의 칼럼을 두고 “논리에 미달하는 선동”이라며 “문학이 이렇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일갈할 때 신형철은 슬픔보다는 분노에 더 기울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분노는 슬픔이 범람해서 분노로 응고한 눈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12년에 쓴 칼럼에서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소설’”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 현실은 암울하고 답답하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근본적으로 문학주의자인 신형철은 이 책에서도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에게는 슬픔 역시 문학적으로 관여하고 소화할 문제여서, “‘비극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는 또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라거나 “시는 세계와 싸울 때조차도, 아름다움을 위해, 아름다움과 함께 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개별 작가와 작품에 관한 이런 언급들은 짧지만 대상의 핵심을 적확하게 포착해 보여준다.

“그녀(=배수아)는 이방인의 시선을 체득해서, 그 시선에만 명확히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어떤 부분과 싸우고 있었다.”

“어떤 정신, 태도, 열정이 벽에 머리를 찧고 피 흘리며 비틀거리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소설이다.”(김사과 <풀이 눕는다>)

“그(=김영승)는 심오하게 적나라하고 정교하게 제멋대로인 시를 쓴다.”

신형철은 “비판이 비평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되기를 소망한다. 분량이 긴 평론에서든 비교적 짧은 문학적 산문에서든 그의 글들은 자신의 그런 생각에 충실해 보인다. 비유나 수사가 승한 미문이 정확성을 지니기는 쉽지 않은 법인데, 신형철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신춘문예 당선 시들의 천편일률성을 비판한 글, 그리고 작고한 평론가 황현산 특유의 부분부정문을 평가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시인이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제 무능한 언어를 학대한 흔적이 없고, 언어가 시인의 통제를 벗어나 날뛴 축제의 흔적이 없다. 시인과 언어가 이렇게 서로 사이가 좋아도 되는가. 그러니 늘 모범답안처럼 보여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는 결론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와중에 저 특유의 부분부정문들을 곳곳에 심는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적병을 하나씩 죽여 나가는 식으로가 아니라, 강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징검돌을 하나씩 놓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 (…) 이것은 부정을 확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부정하기 위한 부정문이다.”

책 말미의 부록 ‘노벨라 베스트 6’, ‘추천사 자선 베스트 10’, ‘인생의 책 베스트 5’는 일종의 덤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