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연구원 ‘정체성 토론회’ 민족학·국가학 인식이 위기
이념 휘둘려 근본문제 외면…학문 성과 갖지 못했다 주장도
한국학은 알듯 모를듯한 학문이다. 한국학의 그릇에 담지 못할 분과 학문이 거의 없다. 반면 한국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문적 기여를 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몇몇 학자들이 이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민족/탈민족 논쟁이 한국학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요동치고 있었다.
우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 지난 8일, 이 대학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학의 정체성 대토론회’를 열었다. 이효걸 안동대 교수는 한국학의 이중적 정체성을 짚었다. “한국학은 한국 지배를 위한 일본의 지역학인 동시에 그 반작용으로서 한국 학자에 의한 자국학으로 시작됐다”며 “이런 역사적 배경이 학문 정체성 혼란에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김철 연세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혼란을 불러온 근대적 문제 설정의 해체를 주장했다. “한국학이 민족학/국가학으로 존재하는 것이 위기의 원인이며, 탈민족주의를 통한 다양한 정체성을 추구하는 게 그 처방”(김철)이라는 것이다.
백영서 연세대 교수와 최원식 인하대 교수는 한국학의 지평을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백 교수는 “핵심 쟁점은 한국학과 민족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라며 “민족주의적 동력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조절하고 넘어서려는 지향인 ‘비판적·역사적 동아시아학’으로 한국학을 재정립하자”고 제안했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최 교수는 “‘한국학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상당히 때 이른 것이며, 이에 대해 무엇을 주장할 만한 학문적 성과와 내용을 (한국학이) 갖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데올로기에 휘둘려온 한국의 학문 풍토가 그 이유다. “(한국 학자들이) 이데올로기 문제를 피하기 위해 한국 현실에서 발생하는 근본적 문제에 천착하지 못하고, 외국의 가치·이념·이론·문제를 들여오는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현실 주제에 대한 장기적이고 좋은 연구가 축적돼야 한국학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림대 한림과학원 한국학연구소도 비슷한 논의를 담은 단행본을 냈다. <21세기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푸른역사)는 지난 2월 이 연구소가 주최한 같은 제목의 학술대회 논의를 보완·확대해 담은 책이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는 탈민족주의를 통해 “한국인의 한국학과 외국인의 한국학 사이의 긴장관계”를 극복하자고 쓴 반면, 한영우 한림대 교수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에 대한 동시적 경계”를 주문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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