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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진실한 욕망에 씌워진 타락의 오명

등록 2018-10-04 20:08수정 2018-10-04 20:58

악마의 미학- 타락과 위반의 중세미술, 그리고 발튀스
백상현 지음/현실문화·1만5000원

“아름다움은 선(善)보다 멀리 간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의 <세미나 7권-정신분석의 윤리>에 나오는 명제다. 책의 핵심 메시지는 쾌락 충동과 도덕 규범이 충돌할 때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 신이 빚은(혹은 그렇다고 믿어온) 질서 속의 윤리와 절제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악마적 아름다움’의 예찬으로 들린다. 라캉 철학 연구자인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은 신간 <악마의 미학>에서 서양의 미술 작품들을 라캉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타락과 위반의 중세 미술, 그리고 발튀스’라는 부제가 지은이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발튀스는 20세기 프랑스 표현주의·초현실주의 사조를 상징하는 화가다. 스물여섯살이던 1934년, 파리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전시작들이 던진 엄청난 충격 덕에 그는 ‘회화의 프로이트’라는 점잖은 비난에서부터 ‘색정광’이라는 힐난까지 한몸에 받으며 문제적 작가로 급부상했다. 특히 논란이 된 작품이 <기타 레슨>이다. 어린 소녀가 의자에 앉은 성인 여성의 무릎 위에 허리가 꺾인 채 누워 있고 바닥엔 기타가 떨어져 있다. 성인 여성은 한 손으로 소녀의 머리채를 붙잡았고, 다른 한 손은 소녀의 은밀한 부위(그림에선 노골적으로 표현된)에 접근한다. 그의 또다른 그림 <벤치 위의 테레즈>도 수위는 낮지만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벤치에 앉은 소녀가 곧 떨어질 듯 한 손으로 바닥에 손을 짚고 한쪽 다리를 올리는 바람에 치마가 걷히면서 속옷이 보이기 직전이다. 발튀스의 그림 상당수가 이처럼 ‘추락의 구도’인데다, 소아성애·동성애·관음증·성폭행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발튀스, 기타 레슨, 1934년. 현실문화연구 제공
발튀스, 기타 레슨, 1934년. 현실문화연구 제공
발튀스, 벤치 위의 테레즈, 1939년. 현실문화연구 제공
발튀스, 벤치 위의 테레즈, 1939년. 현실문화연구 제공

지은이는 묻는다. “불편한 성적 환상의 이미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답한다. “발튀스가 도달하려 했던 장소는 서구 미술의 역사가 수천 년간 은밀하게 숨겨왔던 인간 욕망의 중핵이었다 (…) 신이 사라진 세계, 진리가 부재하는 폐허의 세기에 발튀스가 불러낸 이미지는 놀랍게도 예수 고난의 형상에 대한 악마적 변주였다.” 그러고 보니 몽환적이기도 한 <기타 레슨>의 구도는 얼핏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와 닮았다.

백상현은 앞서 2014년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을 썼고, 올해 초엔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소크라테스, 욕망의 철학적 기원에 관하여>에서 욕망의 억압에서 비롯한 ‘히스테리’를 분석한 바 있다. 이번 책도 그런 작업의 연장으로 보인다. 지은이에 따르면 “일단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단지 해체하는 대신 새로운 환상의 유형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은 (…)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진실한 꿈, 가장 독창적인 꿈을 꾸는 것”이다. “고정관념의 신성한 권위에 대한 모독 없이 진정한 신성함에 이르지 못할 것이란 역설적이고 악마적인 인식”이 이런 맥락 위에 놓인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 이삭의 희생, 1528년경. 현실문화연구 제공
안드레아 델 사르토, 이삭의 희생, 1528년경. 현실문화연구 제공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법열, 1647~52년. 현실문화연구 제공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법열, 1647~52년. 현실문화연구 제공

지은이가 말하는 ‘악마의 미학’을 단적으로 함축한 단락은 이렇다. “발튀스는 타락한 욕망의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루시퍼의 수도사였다. 모든 진실한 욕망은 타락의 오명을 덮어쓸 수밖에 없다는 신념 속에서 그의 작품은 신성과 신성모독을 동일한 것으로 뒤섞고 (…) 이것은 우리가 ‘부활’이라는 개념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실천이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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