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래퍼·방송인 DJ 래피
래퍼이자 방송인인 DJ 래피(본명 김동효)는 지난달 지상파 라디오 프로그램 단독 진행을 맡았다. 게스트 생활 14년 만의 ‘영전’이다. 그의 이름을 딴 <래피의 드라이브 뮤직>(에스비에스)은 매주 토·일 오후 2~4시 생방송으로 청취자들과 만나고 있다. 그는 2006년부터 <에스비에스> 라디오 <김창열의 올드스쿨>에서 보조 진행자로 ‘래피의 드라이브 뮤직’ 코너를 이끌어왔다. 10년이 넘는 셋방살이를 끝내고 독립 가옥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글 쓰는 디제이’이다. 지난 6월 칼럼 모음집 <래피의 사색>(더스토리)을 낸 데 이어 최근 700쪽이 넘는 <주역> 해설서 <한글로 쉽게 읽는 내 인생의 주역>(윌링북스)을 출간했다. 지난 8월부턴 <오비에스> 독서예능 <군인들은 무슨 책 읽어>도 진행하고 있다. DJ 래피를 지난 5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의 손전화 메모장을 봤더니 독후감 메모가 3000개가 넘었다. 두 번 이상 읽었다는 책의 독후감 메모만 971개다. “제가 메모광입니다. 6년 전 책에 빠진 뒤론 집에 티브이도 치웠어요. 잠자고 음악 하는 시간을 빼곤 늘 책을 봐요. 운전할 때는 오디오 북을 듣고, 걸을 때도 횡단보도 앞에서 전자책을 보죠. 지난달엔 70권을 읽었더군요. 하루에 6권을 읽은 적도 있어요.”
그는 진주고 시절 학내 록밴드 보컬이었다. 형사인 아버지는 아들의 밴드 활동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아들은 단단한 의지로 공부했다. 수능을 잘 봐 수도권 대학으로 가는 게 아버지 감시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봐서다. 뜻을 이뤄 1994년 경희대 섬유공학과에 갔다. 하지만 대학에서 바로 좌절을 맛봤다. 사투리 때문에 대학 록밴드 동아리 가입이 막힌 것이다. 이 시련은 그를 변화시켰다. “군 입대 전에 용돈을 벌려고 디제이 알바를 했어요. 이때 음악의 다양한 세계를 깨쳤어요. 해외 최신 음악을 들으며 록 외의 음악에도 마음을 열었죠. 힙합 음악을 듣고 ‘와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죠.” 제대 하고 바로 1998년 경희대 최초 힙합동아리 래빈을 만들었다. 당시 4개 대학에 있던 힙합동아리 연합회 결성도 주도했단다. “최자 개코 스컬도 연합회서 함께 활동했죠.” 그는 대학에서 전액 성적 장학금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한테 ‘장학금도 받았으니 이젠 (음악 하는 것) 봐주이소’란 말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대학 평점이 4점을 넘었어요. 2003년 졸업할 때 교수님이 대학원 진학을 권하기도 하셨죠.”
2000년엔 음악 케이블 방송 <엠넷>의 프리스타일 랩 배틀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를 계기로 홍대여신으로 알려진 요조 등과 3인조 힙합그룹 ‘셰익스피어’를 만들어 첫 음반을 냈단다. “폭망했어요. 음반 출시 뒤 매니저가 바로 자취를 감췄거든요.” 이 시련도 그를 변화시켰다. “첫 음반 실패 뒤 가수에 회의를 느끼고 작곡 공부를 시작했어요. 지금 저작권 등록된 제 노래가 182곡 정도 됩니다.” 라디오 게스트는 2004년 <에스비에스> 라디오 진행자 디제이 처리(‘철이와 미애’의 신철)의 권유로 시작했다. “처리 형이 부탁해 트로트에 랩을 넣은 음악을 선보였는데 대박이 났어요. 지금도 고속도로에서 트로트에 섞인 랩 음악이 나오면 다 내 목소리죠.”
98년 경희대 첫 힙합동아리 결성
‘엠넷’ 프리스타일 랩 배틀 우승도
9월부터 ‘SBS’ 라디오 진행도 맡아
최근 700쪽 넘는 주역 해설서 펴내
“6년 전 책 빠져 독후감 메모 3천개
주역 공부한 뒤 오만함 사라져”
활자 중독은 어떻게? “아버지가 2012년 6개월 시한부 암 선고(담도암)를 받았어요. 이때 아버지 병세와 관련한 의학서적이나 논문을 열심히 읽었어요. 이게 습관이 되었죠.” 부친을 떠나보낸 2014년께 그는 ‘사서삼경의 끝판왕’이라는 주역에 빠졌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사서삼경과 공자에 관심이 갔죠. 죽음을 앞둔 공자가 ‘몇 년 더 살면 주역을 배워 큰 허물을 면할 텐데’라고 했다잖아요. 그 이유가 궁금해 주역을 읽기 시작했죠.” 집필은? “처음은 주역을 보면서 나만 보는 메모를 했어요. 그러다 출판사 제안을 받아 2년 동안 책을 썼어요.”
<주역>은 유학의 삼경 중 하나로 세계 변화의 원리를 기술한 책이다. 그의 주역 해설서엔 한자가 없다. 한글만으로 주역 64괘의 괘사와 효사를 짚어간다. 그의 손전화 메모가 빛을 발했을 각주도 만만치 않은 분량으로 달려 있다. “한자를 없앤 것은 독자가 한자의 압력에 무릎 꿇지 않고 주역을 끝까지 읽도록 하기 위해서죠.”
그는 인터뷰 도중 한자 역(易)이 새겨진 목걸이를 보여줬다. “주역은 저를 바꾸어 놓았어요. 가장 큰 거는 교만함이 없어진 거죠. 저를 알았던 사람은 깜짝 놀라요. 많이 바뀌었다고요. 제가 원래 로커라 많이 교만했거든요. 주역의 15번 괘(지산겸괘)가 겸손을 뜻하죠. 땅 위에 솟아 있어야 할 산이 땅 아래 있는 형상이거든요. 늘 마음에 새기는 괘입니다.” 주역 각 괘의 효사들을 보면서 ‘이게 바로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단다. 64괘 중 하나를 뽑자면 첫 번째 괘인 ‘중천건괘’라고 했다. “용의 이야기인데 너무 재밌어요. 이 괘 효사 중에 ‘높은 용이나 후회가 있다’는 ‘항룡유회’란 구절이 있어요. 교만이 극에 달하면 후회가 있을 것이란 얘기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잖아요. 역은 바꾸다, 바뀌다의 뜻을 다 가지고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이 수시로 바뀐다는 얘기죠. 그래서 교만하면 안된다는 거죠.” 한자 공부는? “주역 이해에 필요한 단어만 했어요.”
이런 말도 했다. “요즘 부와 명예를 누리는 래퍼들 가사를 보면 내용이 없어요. 철학이 없어요. 돈이나 차 자랑이죠. 그런데 방탄소년단 노래를 보면 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쓴 가사가 많아요.” 그가 지난 5월 발표한 ‘쿵 하면 짝’은 주역 가르침을 담은 곡이다. 가사는 ‘절대적 진리, 그것은 과연 존재하는가?’로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이쪽에서 쿵 그쪽에서 짝 쿵! 짝! 쿵! 짝!’이란 구절이 반복해 나온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주역 해설서를 낸 DJ 래피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자신의 책을 익살스럽게 소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DJ 래피의 손전화 메모장엔 3천개 이상의 독후감 메모가 있다.
DJ 래피가 <래피의 드라이브 뮤직>(에스비에스) 방송 스튜디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DJ 래피가 인터뷰 도중 한자 역(易)이 새겨진 목걸이를 보여주고 있다.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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