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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주의 이익을 좇는 사이비 언론 ‘복마전’

등록 2018-10-25 20:07수정 2018-10-26 13:32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 번역출간
창간준비호 내는 신문사 편집국 배경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 총리 풍자
언론 전반의 속류화 향한 경종 울려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1만3800원

<제0호>는 움베르토 에코(1932~2016)가 숨을 거두기 1년 전인 2015년 초에 낸 그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소설이다. 1980년작인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줄기차게 자신의 이름에 따라 붙는 것을 가리켜 에코는 어느 인터뷰에서 “나는 그 책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말한 바 있다. 첫 책이 대표작이 됨으로써 이후에 나온 책들이 그 그늘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는 ‘데뷔작의 저주’에 대한 불만을 표한 것인데, 그것은 동시에 그만한 자부심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옳을 것이다.

에코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점에서 <제0호>는 그가 부른 ‘백조의 노래’라 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영어로 치면 ‘Number Zero’에 해당하는 원제 ‘Numero Zero’는 0이라는 숫자가 지닌 상징적 의미 때문에도 눈길을 끈다. 0은 시작과 종결의 뜻을 아울러 지닌다.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가 하면 무(無)의 심연으로 캄캄하게 가로막혀 있다. 나중에 에코 자신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밀라노의 건물이 등장하는 대목을 소설에서 읽으며 선득해지는 독자도 적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 소설에서 ‘Numero Zero’란 신문이나 잡지의 창간 준비호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식으로 통권 1호를 발행하기 전에 연습 삼아 그리고 홍보를 겸해 내는 시험판 또는 번외판을 ‘제0호’라 하는 것. 에코의 이 소설은 ‘도마니’(내일)라는 제호의 신문을 내기 위해 모인 기자들이 창간 준비호를 만드는 과정을 얼개로 삼는다. 1992년 4월6일부터 같은 해 6월11일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이 시간 배경을 이룬다.

저녁 텔레비전 뉴스가 그날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살뜰히 챙겨 알려주는 시대에 다음날짜 신문을 어떻게 만들지는 신문 업계 종사자들을 크게 괴롭히는 고민이다. 그런 점에서 “내일 벌어질 수 있는 일에 관해 말할 것”이라는, 제호와 관련한 주필 시메이의 설명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 격인 것이, 주필인 그와 사주인 비메르카테는 처음부터 신문을 창간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시늉만 내려던 것. 무엇 때문에?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겸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 2015년작 마지막 소설 <제0호>에서 사실과 거짓을 뒤집고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사이비 언론의 행태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열린책들 제공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겸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 2015년작 마지막 소설 <제0호>에서 사실과 거짓을 뒤집고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사이비 언론의 행태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열린책들 제공

소설은 시메이의 스카웃을 받은 쉰 살 독신남 콜론나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된다. 지방 신문 기자, 대학 출판부 편집자, 출판사 투고 원고 검토자, 대필 작가 같은 “싸구려 글쟁이 노릇”으로 나이를 착실히 먹는 사이 패배자의 자리에 자신을 놓게 된 그는 시메이한테서 괴이쩍은 제안을 받는다. 창간되지 않을 신문 ‘도마니’를 1년 동안 준비하면서 겪는 일을 시메이의 시점으로 기록하는 회상록을 대신 써달라는 것.

순전히 돈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동료 기자들까지 속이며 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척하는 데에서 보듯, 콜론나를 제대로 된 언론인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시메이를 앞세워 가짜 신문 창간을 추진하는 비메르카테의 의도와 그 바탕을 이루는 언론관에 비한다면 콜론나의 처신은 애교에 가깝다. 수십 채의 호텔과 요양원, 몇 개의 지방 텔레비전 채널을 소유한데다 스무 개쯤의 잡지를 발행한다는 이 인물에서는 미디어 재벌 출신인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느 수사 판사가 노인 요양원의 운영 실태를 수사한다는 소식을 접한 시메이가 해당 판사의 뒤를 캐서 약점을 잡으라는 지시를 기자에게 내리고, 판사가 공원 벤치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에메랄드빛 양말을 신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의기양양해하는 장면도 2009년 베를루스코니 소유 방송사가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와 관련해 내보낸 ‘고발성’ 보도를 패러디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오늘날에는 누군가에게 고발을 당하거나 기소를 받게 되었을 때 그것에 응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그 고발인이나 기소인의 정당성을 떨어뜨릴 만한 것을 찾아내면 됩니다. (…) 아무리 청렴하고 공정하다고 해도 백 퍼센트 그런 사람은 없어요.”

수사 판사의 뒤를 캐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시메이가 한 이런 발언은 본말을 뒤바꾸고 진실과 거짓을 호도하는 사이비 언론의 생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감춰진 진실을 들춰내고 사회 정의를 세운다는 언론 본연의 임무에 시메이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다. “우리가 어떤 기사를 쓸 때마다 콤멘다토레(=비메르카테)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뜻인가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당당하게 답한다. “물론입니다. 그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른바 지배 주주이거든요.” 더 나아가 그는 “우리 발행인과 다툼을 벌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라고 기자들에게 지시한다. 공적 기능이 아닌, 사주 개인의 이해관계에 매체를 종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겸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제공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겸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제공

“문화계의 사건을 다루되 인터뷰 형식을 취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어떤 책의 저자를 인터뷰할 때는 그 저자와 평화롭게 소통할 수 있어요. 어떤 저자도 자기 책을 나쁘게 말하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우리 독자들은 악의적이고 너무 거만한 혹평을 접하지 않을 겁니다.”

문화 기사를 작성하는 원칙에 관한 시메이의 말을 접하며 뜨끔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책을 포함한 문화적 창작물을 다룰 때 객관적이거나 비판적인 리뷰보다는 저자나 창작자를 상대로 한 우호적 인터뷰에 의지하는 것이 오늘날 반드시 우파 언론만의 속성은 아니다. 언론 전반의 속류화 흐름과 그것은 관련되는 것이고, 에코는 그런 흐름에 경종을 울리고자 하는 것.

<제0호>는 미디어 사유화와 속류화, 그를 통한 중우 정치를 대표하는 베를루스코니와 우파 언론을 향한 신랄한 풍자와 야유를 담은 소설이다. ‘도마니’ 편집국의 복마전 같은 풍경과 함께 콜론나의 동료 기자 브라가도초가 몰두하는, 무솔리니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의 세목과 그 향방은 소설의 또 다른 기둥을 이룬다. 소설은 가짜 신문 창간 소동과 무솔리니 관련 음모론 추적이 거의 동시에 막을 내리면서 끝나는데, 언론에 관한 에코의 회의와 야유는 마지막까지도 생생하다. 소설가 에코가 부른 백조의 노래이자 유언으로서 <제0호>의 기조는 매우 음울하지만, 경쾌 발랄한 문체와 유머, 폭포수 같은 박식의 향연은 팔순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고 활기차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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