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가을엔 역시 에세이… 소설가 네 사람의 4색 향기 듬뿍

등록 2018-11-01 20:01수정 2018-11-01 20:14

구효서, 유용주, 김서령, 백영옥
고향, 문학, 사랑, 눈물 등 다뤄
약 처방받듯 책에서 지혜를 얻다
소년은 지나간다-스물네 개의 된소리 홑글자 이야기
구효서 지음/현대문학·1만4000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유용주 지음/걷는사람·1만2000원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
김서령 지음/허밍버드·1만4000원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백영옥 지음/아르테·1만5000원

가을엔 에세이를 읽고 싶다. 시와 소설에 비해 부담이 덜하고, 글쓴이의 인간적 체취와 육성에 좀 더 가까우며, 결실과 상실이라는 계절의 순환적 질서에 조응하는 에세이를. 마침 소설가 네 사람이 각자의 개성과 향기를 담뿍 머금은 에세이를 내놓았다.

구효서의 <소년은 지나간다>는 강화도의 고향 마을 창말에서 보낸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뻘, 깨, 뽕, 쓰, 찍, 때, 뼈 같은 한글 된소리 홑글자들을 화자로 삼은 형식 실험이 이채롭다. 24개 짧은 장으로 나뉜 구성이지만, 책 전체를 일관하는 핵심적인 인물과 사건이 없지 않다. 어린 딸을 데리고 혼자 사는 ‘여자’가 그 인물. 총성이 멎은 지 10여년 된 시점. 전쟁이 망가뜨린 여자의 기구한 삶에 얽힌 사연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창말에는 그런 묘한 기운의, 뻥이 있는 것이다. 터져 흩어진. 텅 빈. 뚫려 환해진. 구멍. 빈터. 없음. 유실. 훼손. 결락. 기운. 생동. (…) 볼 수도 기억할 수도 얘기할 수도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 온갖 분노와 욕정과 수수께끼 같은 창말 사건들의 기원이 되고 마는 것.”(‘뻥’)

유용주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는 열네 살 나이에 중식당으로 팔리다시피 떠났다가 40년 만에 돌아온 고향 장수의 산천과 이웃·친구들, 박경리·박상륭·이중기 등 문인들에 관한 이야기, 세월호 참사에서 박근혜 탄핵과 그 이후에 이르는 사회적 현안을 다룬 글들을 두루 담았다.

“40년 동안 세상 밑바닥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하루도 고향을 잊은 적 없다. 내 모든 작품은 장수에서 나왔다. 내 모든 희로애락 오욕칠정은 모두 고향 땅에서 나왔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에 돌아왔건만, 막상 그를 맞은 것은 그가 기대했던 고향과는 다르다. 농축산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고, 스무 가구도 안 되는 동네에서 이장 선거가 치열하며, 노인들은 하루 종일 종편에나 눈과 귀를 준다. 그가 세월호를 비롯한 현안들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가까이에서 접하는 이들의 이런 행태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에세이를 읽기에 좋은 계절 가을에 맞추어 소설가 네 사람이 각자의 개성과 향취를 가진 에세이를 내놓았다. 왼쪽부터 구효서, 유용주, 김서령, 백영옥. <한겨레> 자료사진.
에세이를 읽기에 좋은 계절 가을에 맞추어 소설가 네 사람이 각자의 개성과 향취를 가진 에세이를 내놓았다. 왼쪽부터 구효서, 유용주, 김서령, 백영옥. <한겨레> 자료사진.

“역경이 없었으면 내 글쓰기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삶이 목숨에 턱 와 닿았을 때, 아! 끝이구나,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할 때, 시는 끓어 넘쳤다. 문학은 그렇게 나를 구원했다. 문학이 없었다면 나도 없다.”

글쓰기의 스승으로 특정 인물이 아닌 ‘역경’을 들 정도로 그는 꿋꿋하고 씩씩하다. 그리웠던 고향과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꾸준히 바른말을 하고 줄기차게 책과 신문을 읽는 일이 지금 그를 버티는 힘이다. 그런 스스로에게 그가 위로 삼아 말을 건넨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김서령의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에서는 “역마살 단단히 낀, 주정뱅이 노처녀 소설가”에서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이 아기 엄마가 된 일인 양 온갖 호들갑을 떨며 아기를 줄줄 빨고 있”는 아기 엄마로 옮겨 온 세월의 세목들을 만날 수 있다. “백만 가지 이유로 사랑에 빠”지면서도 연애가 깊어질 만하면 자기 안의 또 다른 욕망을 좇아 여행 가방을 꾸리던 시절, “제발 연애에 집중 좀 해 줄래?”라는 애인에게 “에이, 뭘 사랑까지 하고 그래”라며 허리께를 툭 치곤 했던 작가는 마흔둘 늦은 나이에 뜻밖의 혼전임신을 하고 내처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시간이 이제 많이 지났고, 나는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쉽게 포기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기쁘고 슬프고 두려운 것도 제법 감출 줄 아는 나이.”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된다.

백영옥의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는 작가가 읽으며 밑줄 쳐두었던 문장들을 매개 삼아 독자에게 삶의 지혜를 건네는 책이다. 약국에서 약을 처방하듯 책을 처방해 주는 서점을 꿈꾸는 작가가 고른 문장들은 결국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로 귀결된다.

“만약 누군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면, 흐르는 눈물은 그 사람이 나를 믿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약함을 내보일 수 있는 게 진짜 용기니까요. 가끔은 흘러넘쳐도 좋아요.”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