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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남쪽 바다 작은 섬에 온 어린 왕자

등록 2018-11-16 06:02수정 2018-11-16 20:06

네가 이 별을 떠날 때
한창훈 지음/문학동네·1만3000원

지금은 ‘임시직’ 출퇴근을 위해 서울에서 지내지만, 한창훈(사진)은 여전히 고향 거문도를 지키며 글을 쓰고 있다. 섬과 바다, 어민들의 이야기를 그만큼 집요하게 소설과 산문으로 풀어내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거문도는 물론 작고 제한된 공간인데, 한창훈은 그곳의 이야기‘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곳‘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믿는 쪽이다.

신작 장편 <네가 이 별을 떠날 때>에서 한창훈은 그 섬으로 어린 왕자를 불러들인다. 생텍쥐페리의 사막에 나타났던 그 ‘아이’가 그로부터 80여년 뒤 한창훈의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되살아난 것.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도 이처럼 작은 섬들을 곳곳에 마련해두었기 때문”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이 소설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전개된다.

생텍쥐페리의 작품에서 비행사가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한창훈의 소설에서 어린 왕자와 친구가 되는 것은 은퇴한 선장이다. 섬에서 성장한 뒤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배를 타기 시작해 외항선 선장 자리에까지 올랐던 그는 아내와 사별한 뒤,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 섬으로 돌아와 있다. 이따금씩 소일거리 삼아 낚시를 할 뿐 긴요하게 매인 일이 없는 그가 주로 하는 일이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암에 걸려 입원한 아내와 주인공은 어느 날 병실에서 지난 일을 회고하던 중 서로에게 ‘가장 절망스러웠던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선장인 남편은 수평선이 가장 절망스러웠다며 “영원히 닿지 못할 곳을 향해 평생을 가야 하는 기분이 들어서”라고 설명한다. 아내에게는 “저녁 여섯시 반부터 일곱시 사이, 아파트 주차장”이 절망의 시공간이었다. 이웃집 가장들이 차를 몰고 들어오고 벨소리가 들리는 그때 남편의 부재가 가장 뼈저리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남편의 고향 섬에 한번 가보고 싶다던 아내의 바람을 끝내 들어주지 못한 것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으로 남았다.

이런 회한과 더불어, 전쟁과 살육이 그치지 않는 지구의 부끄러운 현실이 그를 괴롭힌다. 80년 만에 지구를 다시 찾은 어린 왕자가 보기에 “지구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건 “같은 지구인”이다. 말도 없이 한동안 섬을 떠났던 어린 왕자는 그 사이에 사막의 전쟁터를 다녀온 얘기를 들려준다. 포탄에 무너진 흙벽돌 무더기 사이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아이를 안고 나왔으나 결국 자신의 품에서 죽고 말았다는. 그런 뒤 어린 왕자는 묻는다. “아저씨는 왜 가만히 있어?”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손님이 남쪽 바다 작은 섬의 퇴직한 선장에게 던진 이 질문은 소설가 한창훈이 독자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무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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