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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가 믿었던 진실들이 모두 편집된 것이라면?

등록 2018-11-23 06:00수정 2018-11-26 11:08

입맛 맞게 ‘진실’ 편집·유통 방식 폭로
31가지 수법과 구체적 사례들로 설명
거짓 진실에 속지 않으려면 의심하고
딴지 걸어 줄 ‘경합하는 진실’ 찾아야
만들어진 진실-우리는 어떻게 팩트를 편집하고 소비하는가
헥터 맥도널드 지음, 이지연 옮김/흐름출판·1만6000원

지난해 1월20일 미국 워싱턴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석했는지를 두고 백악관과 언론 사이에 공방이 벌어졌다. 언론은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사진을 나란히 실어, 트럼프 때 참석 인원이 훨씬 적다는 ‘사실’을 내보였다. 뿔난 트럼프는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한테 언론 브리핑을 하라고 지시했고, 이튿날 스파이서는 “역사상 최대 취임식 인파”였다고 강변했다. 압권은 1월22일 켈리엔 콘웨이 백악관 고문의 <엔비시뉴스> 인터뷰였다. 진행자가 “왜 첫 브리핑부터 거짓말을 했느냐”고 묻자, 콘웨이는 “당신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스파이서는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대안적 사실’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진실>은 정치·경제·사회·역사의 사건들을 통해 진실을 입맛에 맞게 편집하고 유통하는 온갖 방식을 폭로한다. 이를 알아야 ‘만들어진 진실’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혁신을 준비하는 기업, 정부기관 등의 의뢰를 받아 조직의 역사·철학·비전을 편집·가공해 이들이 추진하려는 목적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목표를 이루도록 돕는 ‘비즈니스 스토리텔링 전략가’이며 소설가다. “가짜 뉴스와 대안적 사실이 판을 치는 요즘, 다시 한 번 ‘진실’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썼다고 한다.

지은이는 사실(팩트)에 기반한 진실만이 아니라 ‘진실로 간주’하고 말하는 것까지 논의한다. 신념이나 주장, 예측 등도 ‘진실’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진실’은 “거짓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특정 사람이나 사건, 물건, 정책을 합당하게, 심지어 똑같은 정도로 합당하게 묘사할 방법은 아주 많다”며, 이것들을 ‘경합하는 진실’이라고 부른다. “진실은 아흔아홉 개의 얼굴을 가졌다.” 어떤 경합하는 진실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선택과 행동이 결정된다. 지은이는 경합하는 진실을 부분적, 주관적, 인위적, 밝혀지지 않은 진실 등 네 가지로 구분하고, 진실을 편집하는 31가지 수법과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핀다.

어떤 말이 대부분 진실일 때조차 진실의 ‘전체’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 예로 역사, 맥락, 통계, 스토리가 다뤄진다. 불편한 진실을 생략하거나 다른 진실에 파묻어버리는 ‘물타기’가 동원되고, 아무 관련 없는 진실들을 마치 의미 있는 관련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게 만드는 ‘관련시키기’ 수법도 등장한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사진(위)과 지난해 1월20일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사진(아래). 트럼프는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 때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우겼다. 워싱턴/AP 연합뉴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사진(위)과 지난해 1월20일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사진(아래). 트럼프는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 때 “역사상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우겼다. 워싱턴/AP 연합뉴스
2002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는 지속적으로 테러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테러리스트는 미국이라는 적을 공동으로 두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교묘하게 이라크와 알카에다가 ‘함께’ 미국을 공격하려 한다는 냄새를 풍겼다. 이라크와 알카에다는 실제로 손을 잡은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거짓말에는 세 종류가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벤저민 디즈레일리) 영국의 2014~2015년 회계연도 세전소득 ‘산술평균’은 3만1800파운드, ‘중앙값’은 2만2400파운드였다. 연봉 2만8000파운드인 교사는 ①‘평균 소득 이하’를 벌고 있다. ②‘평균 소득 이상’을 벌고 있다. 둘 다 ‘진실’이다. 선동가는 ‘어떤’ 평균인지 말하지 않는다. 입맛에 맞게 골라 사용할 뿐이다. 소수에게 부가 쏠린 사회에서 산술평균은 별 의미가 없다.

무언가가 훌륭하다(도덕성), 바람직하다(취향),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이 곧 진실’인 주관적 진실이다. 이것도 조작 가능하다. 지은이는 오랫동안 도덕적으로 문제가 안 됐던 아편 등 마약을 ‘악마화’한 전략을 예로 든다.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업체 드비어스와 광고회사가 마케팅 전략을 세워 거대한 결혼반지 시장을 만들어 내고, ‘다이아몬드는 희소하다’는 ‘착각’을 지속시키고, ‘사랑의 징표’라는 인식을 심어 반지를 내다팔지 못하게 해 여전히 높은 가격에 팔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대목에선, 놀아났다는 허탈감과 분노가 밀려온다.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거나 이름을 짓는 행위는 인위적 진실을 만들어낸다. 2005년 <시비에스뉴스> 여론조사에서는 미국 여성 24%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7%는 이 단어를 모욕적으로 생각했다. 남성은 14%가 페미니스트라고 답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페미니스트를 “양성의 사회·정치·경제적 평등을 믿는 사람”이라고 제시하니,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여성은 65%로 뛰었다. 남성도 무려 58%가 페미니스트라고 답했다.

‘파타고니아 이빨고기’는 괴물처럼 생기고 맛도 없어 버려지는 물고기였다. 미국의 생선 수입업자가 미국에 들여와 ‘칠레 농어’(실제 농어와 관련 없다. 한국에서는 ‘메로’)라고 이름 붙여 대박을 터뜨렸다. 개체수가 급감하자 먹지 말자는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기후 변화’라는 말은 ‘지구 온난화’보다 덜 위협적이어서 온난화의 심각성을 감소시킨다.

미래 예측과 신념은 밝혀지지 않는 진실에 속한다. 1978년 인종 평등과 사회주의를 주창하다 이후 ‘하나님’을 자처한 제임스 존스 목사를 따라 남미 가이아나로 간 918명이 집단 자살·살해한 ‘인민 사원’ 사건은 신념이 부른 참혹한 결과였다. 외부와 고립된 ‘그들만의 공동체’에선 믿음 조작이 쉽다.

지은이는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수법들을 살핀 뒤 만들어진 진실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의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알고리즘을 이용한 맞춤형 정보가 제공됨에 따라 좋아하는 뉴스 등 걸러진 정보만을 점점 더 접하게 되고 그 안에 갇히는 현실을 경계하고, 내 사고방식과 내 집단의 신념에 딴지를 걸어줄 ‘경합하는 진실’을 찾아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더 온전한 진실”보다 강력한 무기는 없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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