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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치적 올바름’과 공동체 이념에 대한 회의

등록 2018-11-23 06:00수정 2018-11-26 11:24

구병모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
공격적 댓글문화, 미러링 등 다뤄
“쓰기 자체에 대한 고민 담았다”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구병모는 지난 6월에 출간한 장편 <네 이웃의 식탁>에서 공동 주택과 공동 육아 같은 ‘대안적’ 생활 방식에 근본적인 질문과 회의를 표한 바 있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는 “과거의 낡은 공동체 이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2015) 이후 3년 만에 묶어낸 그의 두번째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에 실린 단편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는 <네 이웃의 식탁>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이다. 갑작스레 벽지의 분교로 발령 난 남편을 좇아 시골로 이사 온 임신부 정주가 주인공. 도회 출신 젊은 부부에게 애정 어린 호기심을 드러내며 사생활을 과도하게 간섭하는 동네 주민들에게 시달리던 정주가 도시의 익명성을 그리워하는 장면에 소설 주제가 응축돼 있다.

‘지속되는 호의’는 도시인들의 휴가지인 해수욕장 옆 물놀이장을 무대로 삼았지만, <네 이웃의 식탁>이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와 통하는 문제의식을 지닌다. 휴가지에서 처음 만난 여자아이의 무람없다 못해 무례하고 공격적인 접근은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의 동네 노인들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다가, 그런 아이를 방치한 채 선글라스와 이어폰 뒤에 숨어버린 아이 아빠의 침묵과 무관심은 익명의 도시 역시 시골과는 또 다른 불안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두번째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을 낸 작가 구병모. 수록작 여덟 단편 중 절반인 네 편에 소설가가 나오는 것을 가리켜 “쓰기 자체에 대한 거듭된 고민의 흔적”이라며 “이제는 이야기의 너머에 또는 기저에 닿고 싶어진 것”(‘작가의 말’)이라고 설명했다. 문학동네 제공
두번째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을 낸 작가 구병모. 수록작 여덟 단편 중 절반인 네 편에 소설가가 나오는 것을 가리켜 “쓰기 자체에 대한 거듭된 고민의 흔적”이라며 “이제는 이야기의 너머에 또는 기저에 닿고 싶어진 것”(‘작가의 말’)이라고 설명했다. 문학동네 제공
이번 소설집에는 여덟 단편이 실렸는데, 절반인 넷에 소설가가 나온다. 그 가운데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정치적 올바름’을 무기로 소설 내용을 비판하고 간섭하는 누리꾼들의 행태를 그린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소설가가 ‘피(P)씨’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제목에 쓰인 ‘피씨’는 그와는 다른 맥락으로 이해된다. 결국 그의 작가 활동에 종언을 고하게 만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덫, 그리고 그 덫이 펼쳐지는 인터넷 공간을 상징하는 퍼스널 컴퓨터(personal computer)를 그것은 가리킨다.

원작 소설이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나름 성공한 작가였던 주인공의 신작은 처음에는 언론 등에서 무난한 서평을 받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와 캄보디아 신부를 악인으로 묘사한 것을 두고 작가의 “편협함과 낡은 세계관”을 지적한 것. 누리꾼들의 아우성에도 작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저마다 입에 칼을 물고 손에 도끼를” 든 그들은 이제 그동안 문제 삼지 않았던 작가의 첫 책에서부터 “의심스러운 대목”을 샅샅이 털어낸다. 처음에는 출판사가, 이어서 작가가 해명과 사과의 글을 올리지만, 분노의 물결을 잠재우기는 역부족. 작가는 다음해에 낸 작품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수비 범위 안에서” 인물들을 움직이게 했지만, 이 역시 왜곡된 세계관을 교묘하게 포장했다는 비판을 듣고, 마침내 지난 시절 “건전가요 목록을 떠올리게” 하는 다음 작품조차 ‘정치적 올바름’의 이름으로 신랄하게 단죄를 받자 결국 절필을 택한다. “말의 죽음”, 곧 문학의 죽음이다.

‘미러리즘’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전술 가운데 하나인 ‘미러링’(mirroring)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불특정 다수 남성에게 주사를 놓아 여성으로 바꾸어버리는 ‘주사 테러’가 미러링의 수단으로 동원된다. 주사를 맞고 여성으로 변한 주인공은 동료 남자 직원의 차별과 폭력을 접하며,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체감하지 못했을 증오와 분노의 민낯”을 새삼 확인한다.

이밖에도 문명이 파괴된 먼 미래를 배경으로, 소설 쓰는 인공지능을 등장시켜 “단 한 개의” “궁극의 문장”을 향한 모색을 그린 ‘오토포이에시스’, 가상현실 세계에 들어갔다가 데이터와 함께 삭제된 이를 통해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를 문제 삼은 ‘웨이큰’, 그리고 “곰”이 들어간 말을 싫어하고 피하게 된 소설가의 이야기 ‘곰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등 구병모는 다채로운 소재와 주제를 다룬다. 역시 소설가가 등장하는 또 다른 작품에 따르면, 그런 작업들은 세상 그 누구에게든 “존재의 이름과 더불어 새로운 서사와 질서를 부여한다”(‘사연 없는 사람’)는 소설가의 정체성과 존재 의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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