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이 세계라면
김승섭 지음/동아시아·2만원
적정 사무실 온도는 섭씨 21도로 알려져 있다. 2015년 보리스 킹마 박사는 실내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여성의 대사율을 감안한 최적 온도를 계산했다. 23.2도와 26.1도 사이로 나왔다. 앞선 다른 연구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선호하는 실내온도를 물었더니, 남성은 평균 22도, 여성은 25도라고 답했다. 여성은 더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그럼 적정 사무실 온도 21도는? 1960년대 ‘몸무게 70㎏’인 ‘40살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삼아서 나온 수치다. 표준화된 인간의 몸은 여성이 아닌 남성의 몸이다. 미국 보건부는 1997~2000년 식품의약청(FDA)에서 판매를 허가했지만 부작용이 커 취소된 10개의 약 가운데 8개가 여성이 복용했을 때 부작용이 더 크다고 의회에 보고했다. 피해를 본 건 여성의 몸이었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다양한 관점이 각축하는 전장인 인간의 몸”을 두고 어떤 지식이 생산되고, 어떤 지식은 생산되지 않으며, 누가 왜 특정한 지식을 생산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생존자 및 가족, 성 소수자의 건강 문제 등을 사회역학으로 풀어 낸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지난해 출간해 큰 울림을 줬던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보건정책관리학부 부교수의 후속작이다. 이번에는 방대한 학술논문 등을 토대로 몸을 둘러싼 지식과 지식이 생산된 맥락을 해부한다.
담배회사는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생산해낸 대표적 사례다. 담배가 발암물질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이들은 과학자들한테 접근했다. 1969년 필립 모리스는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생리학자 한스 셀리에(1907~1982)에게 3년간 15만달러를 주는 특별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그 뒤 셀리에는 법정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담배의 장점을 증언했다. 스트레스가 질병의 원인으로 부각되면 담배의 유해성이 가려질 것으로 판단한 담배회사의 전략이었다. 미국 암연구소는 스트레스가 암을 일으킨다는 근거는 미약하다고 말한다.
200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데렉 야크(63)는 ‘담배를 권하는 가짜 과학’이라는 논문에서 담배회사가 과학자들을 매수했다고 비판했다. 16년 뒤인 2017년 9월 필립 모리스는 12년간 매년 8천만달러를 투자해 ‘연기 없는 세상’ 재단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재단 이사장으로 야크가 임명됐다. 야크는 10월 ‘연기 없는 세상을 위한 재단’이라는 논문을 내, 금연이 힘든 사람들에게 덜 위험한 담배를 권하는 것이 담배로 인한 사망률을 낮추는 데 중요하다며 전자담배가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필립 모리스가 전자담배 ‘아이코스’의 승인을 받기 위해 2016년 식약청에 낸 유해성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는 24개 생체지표 중 23개에서 기존 담배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고 나왔다. 전자담배가 덜 유해하다는 증거가 없다는 뜻이다. 필립 모리스는 2016년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덜 해로운 담배 선택권’ 즉 전자담배 연구를 제안하며 장학금 지원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기도 했다.
생산되지 않는 지식도 있다. 김 교수는 1975~1999년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허가된 1393개의 신약을 분석한 연구결과를 소개하며, 저소득 국가에 필요한 감염성 질환을 치료할 신약 개발은 적고, 고소득 국가에 많은 신경계와 심혈관계 질환 관련 신약이 많이 개발된 사실을 짚는다. 이윤이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식을 생산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셈이다.
김 교수는 “보는 시선이 지배하는 시선이다”는 미셸 푸코(1926~1984)의 말을 인용하며, 조선인의 몸을 봤던 일본 제국주의의 시선도 살핀다. ‘과학’이란 미명 아래 만들어진 지식이 식민통치에 중요한 구실을 한 때문이다. 1903년 일본 오사카 박람회의 ‘학술인류관’에는 조선인 2명, 아이누인 7명 등 모두 28명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전시됐다. 일제는 조선인의 몸을 ‘관찰’하고 ‘지식’을 만들어냈다.
1918년 루트비히 히르슈펠트(1884~1954)는 마케도니아 전장에서 16개국의 군인 8500명의 피를 뽑아 혈액형을 확인한 뒤 ‘생화학적 인종계수’(A+AB형/B+AB형)라는 지표를 만든다. A형이 B형보다 더 진화했다는 가정을 담고 있다. 일제는 이를 활용했다. 일본인이 인종계수가 가장 높고, 조선의 지역이 일본과 가까울수록 수치가 높다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김 교수는 “이러한 지식의 생산 과정에 대해 질문해야 현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식 생산과 배제에 관한 논의는 푸코의 ‘권력-지식’론을 떠올리게 한다. 푸코는 권력이 지식을 생산하고 떠받치며, 지식은 권력의 효과를 유도하고 확산시킨다고 봤다. 지식들의 역사를 탐색하며 권력의 음험한 전략들을 파헤쳤는데, 이를 ‘계보학’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지금 현재의 권력-지식을 드러낸다. 또 사회역학자답게 불평등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몸에 새겨진 불평등의 상처도 살핀다.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제임스 핸슨 교수팀은 가구 소득수준에 따른 영유아 77명의 뇌를 자기공명사진(MRI)으로 촬영하며 대뇌 회백질의 크기 차이를 관찰했다. 대뇌 회백질은 사고와 인지능력 등을 맡아 뇌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 태어났을 때 거의 차이가 없던 대뇌 회백질이 시간이 지나면서 크기에서 차이가 벌어졌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하지 않았을 때 남성과 여성의 사망비는 1.18 대 1이었지만 흑사병이 유행한 때는 0.89 대 1이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죽음에도 성, 소득, 인종 등에 따른 차별이 있다.
김 교수의 마지막 물음은 이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지식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한국 대학의 연구업적 평가체계는 외국 학술지에 영어로 발표된 논문에 높은 가중치를 둔다. 외국의 입맛에 맞는 주제가 선정되고, 한국 문제를 다루는 논문은 정작 한국에서는 공유되거나 논의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고유 문제를 한국어로 고민하고 쓰는 연구자들이 대학에서 가장 살아 남기 어렵다. 특히 한국사회의 사회적 약자에 관해 연구하는 경우 더욱 도드라진다.” 그의 질문은 한국에 필요한 지식 생산을 배제하는 지식생태계에 대한 고발이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