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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리소설에는 역사가 없다는데…

등록 2018-12-14 05:59수정 2018-12-14 20:22

식민시대 추리소설 다룬 ‘탐정의 탄생’
“이해조 ‘쌍옥적’이 최초의 추리소설”
대표 추리작가 김내성의 친일도 밝혀
탐정의 탄생-한국 근대 추리소설의 기원과 역사
박진영 지음/소명출판·2만8000원

“한국의 추리소설에는 역사가 없다. 결코 일천하지 않은 역정을 걸어왔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갖지 못했다.”

이런 과감하고 도발적인 주장을 하는 이가 있다. ‘한국 근대 추리소설의 기원과 역사’라는 부제를 단 책 <탐정의 탄생>을 쓴 박진영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가 그다. 월봉저작상 수상작인 첫 저서 <번역과 번안의 시대>(2011), 한국출판학술상을 받은 두번째 책 <책의 탄생과 이야기의 운명>(2013) 같은 평판작을 낸 학자의 주장이기에 흘려듣거나 무시하기 어렵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 추리소설은 주류 문학사에 포함되지도 못했고 높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특히 식민지 시기 추리문학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죠. 이해조와 김내성을 비롯해 식민지 시기 추리 작가와 작품을 복원하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13일 전화로 만난 박진영 교수는 추리소설을 대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를 먼저 지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한낱 오락거리나 통속물 취급을 받다 보니 추리소설의 전통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고 그 역사성도 묻혀졌다”고 덧붙였다. 수용자쪽만이 아니라 창작과 생산자쪽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탐정의 탄생>은 박 교수가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로 자리매긴 이해조의 신소설 <쌍옥적>(1908~9년 연재, 1911년 출간)에서부터 해방 무렵까지 한국 추리소설의 역사를 개괄한 책이다. 사복형사 콤비와 여성 아마추어 탐정이 힘을 합쳐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 <쌍옥적>은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적어도 네 차례나 출판사를 바꾸어 출간될 정도로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박 교수는 특히 <쌍옥적>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여성 사립탐정 ‘고 소사’에 주목한다. 크고 작은 사건 해결에 능력을 보여 ‘여정탐’(여성 탐정)이라는 별명을 얻은 고 소사가 소설 속 핵심 사건 해결에 뛰어들었다가 초반에 살해당하는 설정을 그는 매우 안타까워한다. “<쌍옥적>의 진짜 주인공 고 소사의 탄생과 비운의 죽음은 한국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만나는 첫 번째 기념비인 동시에 남성 중심적인 추리소설의 제단에 바쳐진 최초의 희생양이다.”

박 교수는 서양 추리소설을 집중적으로 번역한 김교제, 1910~20년대 한국어로 번역된 서양 추리소설의 중간 매개자였던 일본의 번역소설가 구로이와 루이코, 그리고 이해조와 안회남, 김내성에 의해 거듭 번역 소개된 세계 최초의 장편 추리소설 작가 에밀 가보리오의 존재를 처음 밝히며, 주요한과 주요섭 형제, 박태원, 김유정 등 본격문학 작가들 역시 서양 추리소설 번역에 나섰다는 사실 역시 알려준다. 특히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기 직전 친구 안회남에게 편지를 보내 탐정소설 번역 의사를 밝혔던 김유정의 유작 번역 <잃어진 보석>(원제 ‘벤슨 살인 사건’)에 얽힌 사연은 지금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추리소설 작가 김성종이 부산 해운대 달맞이언덕에 만든 추리문학관 내부 모습. 박진영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는 저서 <탐정의 탄생>에서 “1970년대에 추리소설 부활의 신호탄을 쏜 현역 작가”로 김성종을 평가하며 그에게서 한국 추리소설의 가능성을 보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추리소설 작가 김성종이 부산 해운대 달맞이언덕에 만든 추리문학관 내부 모습. 박진영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는 저서 <탐정의 탄생>에서 “1970년대에 추리소설 부활의 신호탄을 쏜 현역 작가”로 김성종을 평가하며 그에게서 한국 추리소설의 가능성을 보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채만식의 <염마>와 김동인의 <수평선을 넘어서>가 1930년대 중반 “한국 근대 추리소설사의 적장자”였다면, 그 뒤를 이어 1930년대 후반에 출현한 김내성은 한국 추리소설의 영광과 치욕을 한몸에 아우른 존재였다. 박 교수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추리소설 전문 작가”라 평하는 김내성은 1939년작인 <마인>에 탐정 유불란(아르센 뤼팽 시리즈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음차)을 등장시켰으나 사건 해결에 실패한 유불란의 탐정 폐업 선언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1940년대에 내놓은 <태풍>과 <매국노>, 아동모험소설 <백가면과 황금굴> 등에 다시 등장한 유불란은 일제 당국의 대동아공영권 이념에 따라 서양 첩보기관과 대결을 펼치는 “체제 협력적 선전 선동”의 도구로 그려질 뿐이다. “김내성의 치명적인 과오는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야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명탐정 캐릭터를 사상적 지도자로 변질시킴으로써 추리소설의 근간을 무너뜨렸다는 데에 있다.”

박 교수는 “대중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각주를 없애고 쉬운 문장을 쓰려 했다”며 “장기적으로는 추리와 탐정, 무협, 판타지를 묶어 본격적인 한국 대중문학사를 쓰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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