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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통의 연대, 곁에 또 곁이 되기

등록 2018-12-14 06:01수정 2018-12-14 19:48

고통을 나누는 것은 왜 어려운가
사회 현장 파헤쳐온 엄기호 신작
‘절대적 고통’ 스스로 표현 어렵지만
고통의 곁은 말하고 듣는 힘 있어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나무연필·1만6500원

흔히들 말한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이런 말도 있다.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다.’

과연, 옳은 말일까? 나의 기쁨이 그간 말하지 못했던 타인의 결핍과 상실을 더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 아픔에 몸부림치는 이를 아무리 위로한다고 해도 그 통증이 덜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 않나? 사랑하는 사람이 비 맞는다고 해서 나까지 덩달아 흠뻑 젖어야 하는 걸까? 혼자 우산을 썼다는 죄책감이 오히려 그와의 관계를 훼손하는 건 아닐까?

고통의 심연에 발을 디뎌본 사람은 안다. 죽어야만 끝날 것 같은 고통의 지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도 안다. 고통을 나누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단속사회> 등 우리 사회의 각종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예민한 시선으로 파헤쳐온 엄기호의 새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고통이란 무엇인지, 고통을 나누는 일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인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2016년 11월 전남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고 백남기 농민의 생가 문고리에 세월호 희생자를 의미하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보성/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16년 11월 전남 보성군 웅치면 유산리 고 백남기 농민의 생가 문고리에 세월호 희생자를 의미하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보성/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흔히들 말한다. ‘고통엔 의미가 있다’고. 이렇게도 말한다. “고통을 겪을 때는 그 고통이 가치가 있고 어떤 교훈을 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에 불가능한 절대적 고통이 있다. “정도가 압도적인 고통, 결말이 죽음에 이르는 절대적인 고통, 전적으로 자기와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고통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사실 고통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고통의 비극성이다. 더 나아가면, 절대적 고통을 겪는 이는 고통을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무의미한 고통이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고통의 십자가는 전적으로 당사자만 지고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이때 고통을 받는 이는 할 말이 없다. 자신에게조차 고통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기에 “미치고 팔짝 뛸 수밖에” 없다. “고통이 몸과 마음을 장악하면 눈앞에 다른 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고통만이 주체가 되어 타자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이끌어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이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사람과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복수성’을 띤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사람은 타인과 ‘공동의 집’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이때 언어는 이 공동의 공간을 건축하는 필수 재료다. 하지만 타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선 소통의 언어가 무의미해진다. 언어가 사라진 감옥에 혼자 남겨지는 것. 고통의 비극은 외로움이다. 고통(苦痛)은 고통(孤通)이다.

2016년 10월23일 낮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백남기 농민 부검 중단을 촉구하는 손팻말과 종이학이 바닥에 뿌려져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백남기다’라고 외치며 고통과 슬픔을 공유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2016년 10월23일 낮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백남기 농민 부검 중단을 촉구하는 손팻말과 종이학이 바닥에 뿌려져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백남기다’라고 외치며 고통과 슬픔을 공유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지은이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고통받는 이가 언어를 잃고 절망의 사슬로 포위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밖으로 나돌던 남편에 상처받다 결국 남편의 사업 실패로 파산에 내몰린 선아, 남다른 투지와 에너지로 인생을 주파하다 노년에 몰려온 각종 질병으로 주저앉아버린 재희 어머니, 사랑하는 아내를 잃곤 우울의 세계에 함몰돼 있다가 신흥종교에 빠져든 노교수, 덕룡 아버지 등이다.

고통에 처한 이가 택한 방법은 다 달랐다. 재희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악다구니를 부리며 고통을 전염시킨다. “너희는 내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며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그에게 남은 것은 소통의 도구 ‘언어’ 대신 오직 ‘소리’뿐이다. 불교 경전을 영어로 옮길 정도로 지식과 교양을 갖췄던 덕룡 아버지는 그토록 신뢰하던 불교의 말과 글을 모두 내던지고 누가 봐도 사이비 냄새가 풀풀 나는 종교에 의탁한다. “이 주문을 외면 정말 마음이 평안해져. 내가 왜 이렇게 큰 도를 몰랐나 몰라.” 그에겐 보편적인 언어가 사라지고 특정 종교 공동체에서만 공유하는 ‘주문’만 남았다. 선아는 고통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집단상담 모임에 나가고 각종 사회학·심리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억울함’과 분리를 시도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속절없이 닥쳐오는 고통의 파고를 피할 수 없어 잠 못드는 밤이 계속된다.

지은이는 이때 고통의 옆자리, ‘곁’에 주목한다. 불평과 짜증만 쏟아내는 어머니에 지쳐 자신 역시 고통에 빠져든 재희 같은 이들이 ‘곁’이다. 고통의 당사자는 언어를 잃고 고립된 처지이지만, 고통의 곁은 다르다. 고통의 곁은 말하고 듣는 힘이 있기에 여전히 공동의 집을 지을 수 있다. 고통의 곁에 또다른 곁을 구축하는 게 필요한 이유다. 고통의 곁에서 함께함으로써 우리는 고통 속에서 고군분투한 이야기, 그 외로움의 이야기를 기꺼이 듣고 나눌 수 있다. 특히 고통 받는 사람, 또는 고통의 곁에 선 사람과 함께 걸으며 대화하는 것은 즉각 말해야 하고 즉각 반응해야 하는 ‘앉아서 얘기하기’보다 유연한 방법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우리의 시선을 외부로 향하게 하는 매개가 됨으로써, ‘지금 당장’의 부담에서 해방시켜 ‘지금 여기’로 나아가게 해준다.

'세월호 참사' 4주기인 지난 4월16일 오후 경기 안산 초지동 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 앞에서 열린 '4.16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 영결.추도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영결.추도식에 앞서 이날 오전 정부합동분향소에 4년 가까이 안치돼 있던 희생자 영정과 위패가 분향소 밖으로 이운됐다. 안산/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세월호 참사' 4주기인 지난 4월16일 오후 경기 안산 초지동 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 앞에서 열린 '4.16세월호참사 희생자 정부 합동 영결.추도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영결.추도식에 앞서 이날 오전 정부합동분향소에 4년 가까이 안치돼 있던 희생자 영정과 위패가 분향소 밖으로 이운됐다. 안산/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지은이는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서 신중함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부박함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고통받는 이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폭력을 행사한다. 가령 백남기 농민 가족을 향해 아버지를 잃어 슬프다면서 어떻게 맛있는 것을 찾아다닐 수 있냐며 패륜아로 매도한 경우다. 악의적인 언론과 다수의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존재를 욕망하면서, 일상을 살아내는 가족들을 ‘가짜’ 취급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거치고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관종’들의 무차별적 공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백남기 농민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과 그 고통을 야기한 피해에 대한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기에 그 문제가 자신들의 삶 전체를 파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고통을 선정적 사례로 전시하고 소비하는 디지털 시대에선 고통받는 이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예의를 갖추는 게 불가능해졌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 것이냐는 근본적 질문이 ’관종 사회’에서 더욱 긴급히 요구되는 까닭이다.

결론을 말하자. 우리는 고통을 나눌 수 없다. 그러나 그 곁을 지키는 이의 곁에서 동행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통의 곁에 곁이 되는 것, 즉 ‘우회’를 통해서.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는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고통의 연대는 가능하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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