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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함께 장마를 보고 같은 음식을 먹기

등록 2018-12-21 06:01수정 2018-12-21 20:11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지음/문학과지성사·9000원

박준(사진)은 2010년대 ‘시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 스타 시인이다. 2012년 12월에 낸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10만을 훌쩍 넘는 독자와 만났고, 지난해 7월에 나온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도 벌써 15만부 남짓 나갔다.

박준 시의 인기 비결 중 하나로 평론가 신형철은 소월과 영랑, 백석에게 가 닿는 한국어 시의 “심미적 유전 형질”을 든다. 실험적이며 난해한 또래들의 시와 달리, 전통적 정서와 가락을 향한 “어떤 고고학적 그리움”을 박준의 시가 자극한다는 것이다. 6년 만에 나온 두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 붙인 해설에서다.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장마-태백에서 보내는 편지’ 부분)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숲’ 부분)

시집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인용한 두 시에 나란히 등장하는바 ‘함께 장마를 보기’란 박준에게 적잖이 중요한 행위인 듯하다. ‘장마’에서 그것이 두 사람 사이의 길거나 짧은 이별 뒤의 해후를 향한 기대와 약속을 담고 있는 반면, ‘숲’에서는 둘이 아닌 셋이 관여된 일이고 왠지 모를 슬픔의 정조가 비구름처럼 낮게 드리워져 있다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친밀한 사람들 사이의 교유와 소통을 가리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역시 인용한 두 작품을 비롯해 상당수 시에서 박준이 간곡한 경어체를 구사한다는 사실도 두드러진다. 특히 시집 맨앞에 놓인 ‘선잠’에서 박준 득의의 경어체가 빚어낸 연시(戀詩)의 사랑스러움은 인상적이다.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 //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 //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선잠’ 부분)

이 시에도 나오거니와, 조건 없는 절대적 사랑의 한 요소로서 ‘먹기’ 역시 박준이 중요하게 여기는 행위이다.

“너도 그만 일어나서 한술 떠/ 밥을 먹어야 약도 먹지/ 병도 오래면 정들어서 안 떠난다// 일어나, 일어나요”(‘목소리’ 부분)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 것입니다// 언 손이 녹기도 전에/ 문득 서럽거나/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전에// 우리는 밥에 숨을 불어가며/ 세상모르고 먹을 것입니다”(‘좋은 세상-영아’ 부분)

인용한 두 시에서 먹는 행위는 병이나 서럽고 무서운 마음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이자 병들고 약한 이를 향한 위로와 보살핌의 방책으로 인식된다. 박준의 새 시집에는 어쩐지 안개비처럼 옅은 비애의 정조가 깔리지만, 그 가운데서도 누군가를 먹이고 함께 먹는 행위만은 겨울 화롯불 같은 온기로 다가온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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