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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와 교황을 주무른 자본가, 야코프 푸거의 ‘민낯’

등록 2018-12-28 06:00수정 2018-12-31 11:31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업가”
가장 부유했던 독일 은행가의 평전
정치·종교와 결탁해 막대한 부 축적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위험에 교훈”
자본가의 탄생-자본은 어떻게 종교와 정치를 압도했는가
그레그 스타인메츠 지음, 노승영 옮김/부키·1만8000원

1523년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의 은행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극히 고귀하고 전능하신 로마 황제이자 지극히 너그러운 군주이시여! (…) 소신이 없었다면 폐하께서는 황제관을 쓰지 못하셨을지도 모릅니다. (…) 폐하께 요청드리는 것은 제가 지불한 금액에 이자까지 계산해 지체 없이 상환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거의 협박하는 투의 독촉장이다. ‘내가 너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는데, 나를 대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불만이 깔려있다. 왕이 법 위에 있던 시절, 황제는 은행가를 감옥에 처넣거나 처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 간 큰 은행가 앞에 쩔쩔맸다. 결국 황제는 제국수석검찰관에게 서한을 보내 은행가에 대한 기소를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이 은행가가 야코프 푸거(1459~1525)다. 낯선 이름이지만, <자본가의 탄생>의 지은이 그레그 스타인메츠(68)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사업가”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푸거와 그의 시대를 담아낸 평전이다. 스타인메츠는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지금은 증권분석가로 활동하고 있다. 책의 원제는 ‘역사상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지난 3월 <포브스>가 꼽은 세계 최고 부자인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54)는 1120억달러 상당의 재산을 보유했는데, 푸거의 재산은 오늘날로 치면 수천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푸거가 정치·종교 권력과 결탁해 부를 쌓는 과정과 그의 돈이 굵직한 사건들에 어떻게 얽혀들어가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끼쳤는지 살핀다.

‘푸거 가문 연대기’의 표지로 쓰인 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초상화 위에 푸거 가문의 문장이 있고, 아래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전경이 그려져 있다. 푸거박물관 소장, 부키 제공.
‘푸거 가문 연대기’의 표지로 쓰인 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초상화 위에 푸거 가문의 문장이 있고, 아래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전경이 그려져 있다. 푸거박물관 소장, 부키 제공.
“푸거는 생애의 전반기는 돈을 벌면서 보냈고, 후반기는 돈을 지키려고 싸우면서 보냈다.” 평민 출신인 푸거 집안은 직물 교역으로 돈을 모았다. 푸거는 베네치아에서 금융과 복식부기를 배웠고, 광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은 광산 도시 슈바츠로 갔다. 광산은 지기스문트 대공이 소유하고 있었다. 방탕한 지기스문트는 베네치아에 물어줘야 할 배상금 때문에 큰돈을 빌려야 했는데, 이전에 빚을 갚지 않아 은행가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푸거는 모험을 했다. 가문의 재산과 지인들의 돈을 모아 빌려줬다. 대공이 빚을 갚을 때까지 슈바츠의 수입을 모두 갖기로 하는 등 여러 조건을 붙였다. 대공이 돈을 안 갚으면 푸거는 파산했을 텐데, 대공은 다시 돈을 빌리기 위해 계약을 지켰다. 푸거가 막대한 부를 쌓는 시발점이었다. 푸거는 곧 지기스문트를 배신했다. 앞날이 더 창창해 보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의 편에 섰다.

푸거가 소유했던 슈바츠와 아르놀트슈타인의 은 광산 및 구리 광산에서의 노동을 보여주는 목판화들. 부키 제공
푸거가 소유했던 슈바츠와 아르놀트슈타인의 은 광산 및 구리 광산에서의 노동을 보여주는 목판화들. 부키 제공
은광 채굴권을 확보한 푸거는 구리 광산으로 눈길을 돌렸다. 구리 사업은 큰돈이 들고 자금 회수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위험한 사업이었다. 큰 구리 광산도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이 잦았던 헝가리에 있었다. 푸거는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에 자금을 댔고, 군대는 헝가리를 침공했다. 헝가리는 평화조약을 맺어 독일 상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푸거는 구리 광산을 매입하고 공장을 지었다. 푸거는 헝가리에서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노동자 선동가를 처형했다. 그가 독일 농민전쟁 때 표적이 된 한 이유다. 푸거는 통신원들을 곳곳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사업에 활용했다. “세계 최초의 뉴스 서비스”인데 ‘푸거 뉴스레터’로 불린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재능은 투자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능력”이었다. 추기경, 주교, 백작, 공작 등을 설득해 돈을 빌렸다. 푸거는 연 5%의 이자를 약속했다. 당시는 이자를 물리면 무조건 고리대금으로 여겼는데, 푸거는 교회의 고리대금 금지 조처를 뒤집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신학자를 후원해 이자가 정당하다는 주장을 펴게 했고,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를 썼다. 교황청 사제들을 오래 전부터 뇌물로 매수해뒀다. 교황은 이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칙령을 내렸다.

푸거는 종교개혁과도 얽혀있다. 1514년 마인츠 대주교 자리를 놓고 3명이 경쟁했는데, 푸거는 자격 미달인 알브레히트를 지원했다. 결정권은 교황 레오 10세한테 있었다. 교황은 ‘축복의 대가’로 돈을 개인계좌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부패한 교황이 주최한 파티에선 매춘부가 추기경과 함께하고 하인들이 금 쟁반에 음식을 날랐을 정도였다. 푸거가 돈을 넣었다. 알브레히트는 푸거한테 빌린 돈을 갚을 방법을 궁리했고,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면죄부’ 판매였다. 교황과 푸거는 면죄부를 판 돈의 절반은 성베드로 대성당, 절반은 푸거가 갖기로 했다.

푸거가 소유했던 슈바츠와 아르놀트슈타인의 은 광산 및 구리 광산에서의 노동을 보여주는 목판화들. 부키 제공
푸거가 소유했던 슈바츠와 아르놀트슈타인의 은 광산 및 구리 광산에서의 노동을 보여주는 목판화들. 부키 제공
1524년 시작된 독일 농민전쟁 때 푸거는 노동자·농민의 표적이 됐다. 인문주의자들은 푸거를 ‘도적’으로 몰아붙였고, 마르틴 루터는 “푸거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했다. 푸거는 귀족들한테 자금을 지원했고, 귀족 군대는 농민세력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냉전 때 동독은 농민전쟁 당시 농민 지도자였던 토마스 뮌처의 초상화를 5마르크 지폐에 새겨넣었는데, 서독은 푸거의 얼굴이 들어간 우표를 발행했었다.

푸거의 돈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영광을 가져다줬다. 푸거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식 4건을 성사시켜, 이들이 베네룩스3국과 스페인, 헝가리까지 지배하게 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선거로 뽑게 돼 있었다. 선거권을 가진 선거후 7명에게 누가 ‘표의 대가’를 후하게 쳐주느냐가 관건이었다. 스페인 왕 카를과 프랑스 왕 프랑수아가 경쟁하자 푸거는 양쪽을 접촉해 정보를 흘리면서 자신의 값어치를 높였다. 누가 황제가 될지 결정하는 사람은 푸거였다. 선거후들에게 뇌물로 줄 돈은 푸거한테서 나왔기 때문이다. 푸거가 카를 5세한테 협박하는 투의 독촉장을 보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지은이는 “푸거는 처음으로 부 자체를 추구했으며,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초의 현대적 사업가였다”고 평가한다. 정치인의 환심을 사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돈으로 규정을 바꾸고, 변호사를 거느리고, 정보를 활용한 푸거는 “처음으로 억만장자들의 길을 닦은 사람”이었다. 2015년 책이 출간됐을 때 <뉴욕타임스>는 “특히 독재적인 통치자들이 지배하는 경제에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위험에 대한 흥미롭고 유용한 교훈적 얘기를 들려준다”고 평했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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