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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변덕 심한 영국 날씨는 문학의 샘이었네

등록 2018-12-28 06:01수정 2018-12-28 19:55

영문학자 알렉산드라 해리스 책
‘베오울프’부터 이언 매큐언까지
날씨를 프리즘 삼아 본 영문학사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
알렉산드라 해리스 지음, 강도은 옮김/펄북스·4만2000원

알렉산드라 해리스 영국 버밍엄대 교수의 책 <예술가들이 사랑한 날씨>는 날씨라는 프리즘을 통해 본 영문학사라 할 수 있다. 영어로 된 가장 오랜 서사시 <베오울프>에서부터 셰익스피어와 디킨스를 거쳐 이언 매큐언과 제이디 스미스까지, 장구한 영문학사를 날씨를 매개로 한 줄에 꿰는 젊은 학자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문학인들만이 아니라 화가들까지 논의에 포함시켜 한층 입체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준다.

“영국 문학은 추위에서 시작한다.”

8~9세기에 쓰인 애가(elegy) ‘방랑자’의 주인공은 고향에서 쫓겨나 얼어붙은 바다를 떠도는 인물이다. “마음속에 겨울을 품은 채, 얼음 섞인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그에게는 내면과 외부 환경이 두루 추운 겨울이다. 덴마크를 무대로 삼은 <베오울프>에서도 날씨가 거칠고 황량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덴마크의 날씨이면서 또한 영국의 날씨이기도 하다.

13~14세기에 쓰인 익명의 서정시에서 비로소 봄의 온화함이 노래되며, 영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1387~1400)는 영국인들에게 친숙한 비로 시작한다. 에드먼드 스펜서의 우화적 서사시 <요정 여왕>(1590~1609) 도입부에서도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계기가 된다.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이 1816년 잉글랜드 남서부 도싯주 웨이머스에서 신혼여행을 보내던 중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해변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풍경을 그린 작품 <웨이머스 만>. 펄북스 제공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이 1816년 잉글랜드 남서부 도싯주 웨이머스에서 신혼여행을 보내던 중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해변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풍경을 그린 작품 <웨이머스 만>. 펄북스 제공
스펜서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셰익스피어 역시 날씨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끌어들였다. <맥베스> 도입부에서는 마녀들이 “좋은 날씨는 나쁜 것이고, 나쁜 날씨는 좋은 것”이라 합창하며, <리어 왕>의 주인공 리어는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고자 험악한 날씨를 동원한다. “불어라, 바람아. 너희 두 뺨을 한껏 부풀려 날카로운 소리를 내어다오!/ 미친 듯이 사납게 불어다오./ 홍수와 허리케인이여, 솟구쳐 올라라./ 첨탑과 풍향계의 수탉들이 완전히 물에 잠길 때까지.”

18~19세기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시집 <사계절>의 작자 제임스 톰슨은 ‘산들바람’(breeze)이라는 말을 특히 좋아했다. 열대에서 부는 북동풍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브리사’(brisa)에서 비롯된 이 낱말 때문에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날씨 감각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1816년 여름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과 셸리는 제네바 호수 근처에서 함께 지내며 유령 이야기 쓰기 내기를 벌였다. 당시 셸리와 동행했던 메리 셸리는 여기서 목격한 번개에 매혹되었고, 전기 충격으로 주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아이디어를 착상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출발이었다.

“가을이나 겨울밤이면 흔히 하늘에 존재하는 사방의 바람들이 서로 만나 격렬히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은 출구를 찾으려고 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집 주변을 으르렁대며 배회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1847)은 “기상학적인 동요와 혼란이 가득한 소설”로 평가 받는다.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거친 날씨와 동맹을 맺은 사람”이다. 그가 떠났을 때 캐서린은 “한밤이 될 때까지 폭풍을 맞으며 밖에 앉아 있는 것”으로 슬픔과 고통을 표현한다. 히스클리프는 죽을 때에도 “창문을 열어놓은 채 죽었다. 그래서 휘몰아치는 비가 그를 흠뻑 적셔놓는다.”

작가이자 미술비평가인 존 러스킨(1819~1900)은 하늘과 구름에 대한 열정을 지나칠 정도로 장황하게 공표했다. <근대 화가론>이라는 미술 비평서를 통해 그는 사람들에게 보는 법을 가르치고자 했고 그를 통해 자연에 표현된 신의 은총을 찬양했다. 그는 특히 윌리엄 터너(1775~1851)의 밝은 색조 그림을 사랑하고 찬미했다. 그가 보기에 터너는 “모든 자연을 생생히 살아 있게 하는 영혼을 그린 화가”로서 “신의 사제”였다.

미술비평가 존 러스킨이 “완벽하게 그려진 황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예”라 극찬한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 <가을 낙엽>(1855~6). 펄북스 제공
미술비평가 존 러스킨이 “완벽하게 그려진 황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예”라 극찬한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 <가을 낙엽>(1855~6). 펄북스 제공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많은 날씨가 기억되고, 말해지고, 글로 쓰이고, 그림으로 그려지고, 필름에 담겨 왔다.” 날씨를 새롭게 묘사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줄리언 반스가 첫 소설을 쓰면서 날씨 묘사를 철저히 배제하는 시도를 한 것이 그 때문이었다. 그와는 다른 맥락에서, 냉난방 기구와 냉장고 등의 발달은 사람들이 날씨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을 막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날씨의 다채로운 다양성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지은이가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인위적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와 안간힘의 희망으로 책을 마무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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