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안녕하시다 1, 2
성석제 지음/문학동네·각 권 1만4500원
“숙종조는 흥미로운 시대예요. 왕비가 넷이었고 예송논쟁이 치열했으며 사화에 해당하는 격변도 네댓 번이나 있었죠. 상소를 올리자면 목숨을 걸 정도로 말의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경제적 변화도 컸죠. 조선조의 어느 임금 하나에 대해 소설을 쓴다면 숙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조선 숙종 시대를 배경 삼은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낸 성석제의 설명이다. 8일 만난 그는 “2003년 <인간의 힘> 이후 장편 역사소설로는 16년 만인데, 역사소설 쓰는 게 힘들지만 중독성이 있다”고 말했다.
<왕은 안녕하시다>는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과 이몽룡의 손자인 서얼 ‘성형’을 일인칭 화자 겸 주인공으로 삼았다. 파락호에 왈패를 자처하며, 할머니(춘향!)가 운영하는 기생방을 근거 삼아 놀고 먹던 그가 우연히 어린 왕세자(숙종)와 의형제를 맺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머지 않아 왕위에 오른 숙종이 그를 궁궐 소속 말직으로 불러들이면서 그는 권부의 한복판에서 숙종조의 파란만장에 몸을 싣는다.
조선 숙종조를 배경 삼은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낸 성석제. “나이 들어 활동이 줄어들고 생활에 적극적이지 않다 보니 지금의 현상에 대해서는 별로 쓸 게 없고 과거 이야기에 더 눈이 간다”며 역사소설을 더 쓸 계획임을 밝혔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파란만장의 핵심에는 남인과 서인 사이의 당쟁과 그를 이용한 임금의 거듭된 환국(換局)이 있었다. 선대 왕들인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 논란과 그와 결부된 예송논쟁은 당쟁과 환국의 마르지 않는 샘 구실을 한다. 약한 군주에 강한 신하라는 ‘군약신강’의 구조는 새내기 국왕의 전투력에 오히려 불을 지핀다. 나인에서 희빈을 거쳐 중전으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됐다가 종내에는 사약을 받기에 이르는 장옥정의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역정이 혼란과 격동을 극으로 치닫게 한다. 그렇지만 <왕은 안녕하시다>를 다름 아닌 성석제의 소설로 만드는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성형이라는 가상의 인물에 있다.
“나는 그전에는 할머니가 손을 써서 무과에 급제시켜두었고, 별감이 된 뒤에는 관리라 하여 군역을 당연히 면제받았다. 그렇지만 남아 대장부로서 국가를 지키는 책임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하고 있긴 했다.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니 되도록 나는 책임을 지지 말자고.”
성석제 특유의 의뭉스런 익살이 돋보이는 인용문은 성형의 사람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비와 서자의 핏줄을 물려받은 그는 타고난 방외인이자 생각과 행동에 거침이 없는 자유인이다. 비록 세자의 간청을 못 이긴 것이라고는 해도 감히 일국의 국왕을 아우로 삼는가 하면, 나중에 희빈을 거쳐 중전이 될 나인 장옥정을 상대로 ‘작업’을 걸며, 변복한 왕을 기생집에 출입시키고 제 집을 임금의 밀회 장소로 제공하는 그의 언행은 근엄하고 위압적인 궁궐 안팎 분위기에 한 가닥 숨쉴 구멍을 뚫어 놓는다.
“에라이 똥물이 줄줄이 파도치는 똥통에 집어넣고 구더기 밥이 되도록 처박았다가 아가리에 푹 삭은 똥물을 처넣고 삼 년 뒀다가 꺼내 오마분시를 할 외입쟁이 놈아!”
늦잠을 자는 손주를 향해 이런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붓는 춘향 할머니라니! 그 할머니가 젊은 시절에는 “조선 천지에서 가장 아름답고 시서화에 고루 뛰어난 절세가인이었는데, 용모는 달나라의 항아요 시재는 조선의 탁문군이라고 불리었다”고 어린 성형에게 일러준 이는 스승 채동구였으니, 곧 성석제의 첫 장편 역사소설 <인간의 힘>의 주인공이다.
장편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낸 소설가 성석제가 8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성씨가 제법 희성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춘향이냐?’는 놀림성 질문을 적잖게 받았다는 작가 성석제. 암행어사를 역임한 문신 성이성(1595~1664)의 생가인 경북 봉화의 고택 ‘계서당’에는 그가 바로 이몽룡의 모델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양반의 실명을 쓰기 어려워 이름을 바꾸었고 대신 춘향의 성을 ‘성씨’로 했다는 내용이다. “당신이 그곳에 있어 지금 여기에 내가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당신이 나예요”라는 소설 종장 대목은 그래서인지 작가 성석제가 소설 주인공 성형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소설에는 숙종과 장옥정 말고도 송시열과 윤휴, 김만중, 박태보 등 실존 인물이 여럿 등장하고 환국과 폐위 같은 역사적 사실 역시 사료에 충실하지만, 작가는 “허구와 사실의 비율이 9대1 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존 인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사료에 충실하게 재현하지는 않았다고도 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로 읽어 달라는 것.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