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네다 마사시 엮음, 조영헌·정순일 옮김/민음사·2만원 고추는 400여년 전 원산지 남미를 벗어나 동아시아 곳곳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고추의 전래 경로를 두고는 여러 ‘설’이 혼란스럽게 공존한다. 한반도에서 고추를 ‘왜개자’로 부른 흔적을 보면, 고추가 일본에서 한반도로 전해진 것 같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류큐 열도에서는 고추를 ‘코레구스’라고 했다. ‘코레’는 고려를 의미한다. <바다에서 본 역사>는 기존 논의에 숨은, ‘ㄱ국가에서 ㄴ국가로 전파됐다’는 식의 내셔널리즘적 전제 자체를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혹시 당대인들이 “고려에서 왔다”고 말할 때 ‘고려’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고려 사람이 전해줬다”)을 가리키는 게 아니었을까? 만약 ‘한반도에 고추를 전한 일본 사람’과 ‘일본에 고추를 전한 고려 사람’이 사실은 한배를 타고 바닷길을 항해한 선원들이었다면? 고추는 바다에서 온 것이다. 이런 발상에는 근거가 있다. 가령 1630년 일본에 머무른 한 서양식 배의 기록을 보자. 이 배의 주인은 일본인인데, 중국 상인이 빌려서 항해를 할 참이었으며, 배의 항해사는 에스파냐 배를 타고 태평양을 오가다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네덜란드인이었다. 이 배는 어느 나라 소속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지은이들은 “‘국가’ 단위로 구분해 이해할 수 없는 개체로서의 바다 세계를 ‘해역’”으로 부르면서, 육지의 관점을 벗어나 “해역이라는 역사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역사를 새로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애초 바다에는 주인이 없다. 학계는 바다를 국가 관점에서 구분 짓고 관리하는 시스템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본다. 우리는 국가의 경계를 선(線)으로 인지하지만, 바다는 면(面)이다. 책은 1200~1800년까지, 근대를 앞둔 600년 동안 동아시아 바다라는 무대에서 펼쳐진 일을 3부짜리 파노라마 역사극으로 보여준다. 1부 ‘열려 있는 바다’의 시대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해역의 교류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와 인도양까지 확산한 13~14세기다. 느슨하고 유연한 육지의 정치권력이 국가 간 긴장이 발생한 경우조차도 무역 등의 해상 교류를 막지 않았다. 2부는 세계적인 변혁기로 ‘대항해시대’라고 불리는 16세기의 동아시아 해역사를, ‘경합하는 바다’라는 틀로 다룬다. 15세기 이뤄진 명의 조공과 해금(다른 나라 선박이 자기 나라 해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함) 체제가 흔들리면서 다시 교역 열풍이 불지만, 육지세력 간 갈등이 해역의 관리·통제를 촉진했다. 3부로 이어지는 ‘공생하는 바다’ 시대의 주인공 ‘근세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책은 인문학과 사회과학 각 분야 연구자들이 모인 일본 ‘동아시아 해역사 연구회’의 활동 결과물이다. 육지 중심적 사관으로는 잘 볼 수 없었던 전근대 동아시아 문명과 문화의 교류 과정이 책 곳곳에서 눈길을 끈다. 오늘날 바다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헤쳐 갈 실마리도 엿보인다. 한국 군함이 북한 선박을 구조한 건 한반도의 공생을 위해서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가 ‘한국 군함이 일본 초계기에 추적레이더를 조준했다’며 한국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행위는, 동아시아 해역이 여전히 육지권력에 종속된 ‘정치의 바다’임을 보여준다. 갈등을 부각하는 육지권력의 정치적 의도를 헤아리는 일이 필수인 이유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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