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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젊은 로맹 가리가 그린 무질서와 혼란의 카니발

등록 2019-01-11 06:01수정 2019-01-11 19:34

죽은 자들의 포도주
로맹 가리 지음, 장소미 옮김/마음산책·1만3000원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로맹 가리(사진·1914~1980)가 열아홉살에 쓰기 시작해 스물세살이던 1937년에 탈고한 첫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수십권에 이르는 그의 책 중에서도 이 책의 출간은 가장 늦어서, 프랑스에서도 2014년에야 비로소 책으로 나왔다. 그가 죽은 지 34년 만이다.

자신의 본명인 ‘로만 카체프’와 가장 가까운 ‘로맹 카체프’라는 이름으로 서명한 이 소설 원고를 가리는 여러 출판사에 보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1938년 연인이었던 스웨덴 기자 크리스텔 쇠데룬드에게 강력한 사랑의 증표로 주었다. 그 뒤 잊힌 듯했던 이 원고는 1992년 파리에서 열린 한 경매에 나와 세상에 알려졌으나, 저작권 문제 때문에 곧바로 출간되지는 못했다.

젊은 시절의 로맹 가리 모습.
젊은 시절의 로맹 가리 모습.
2014년 처음 공개되기 전에도 이 책에 관한 언급과 소문이 없지는 않았다. <하늘의 뿌리>로 1956년 공쿠르상을 받았던 가리는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낸 <자기 앞의 생>으로 유일하게 공쿠르상 2회 수상 작가가 되었다. 그의 사후, 자신이 에밀 아자르임을 밝힌 책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그는 역시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낸 소설 <가면의 생>에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서 따온 두 구절”이 있음을 밝혔다. 같은 책에서 그는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 관해 이렇게도 말한다. “나는 이 원고를 온갖 전쟁이며 풍랑이며 대륙들로 끌고 다니며 던져두었다가 다시 붙잡기를 되풀이했다. 이 소설은 청춘부터 성숙한 시기까지 줄곧 나와 함께했다.”

가리 생전에 원고 상태를 탈피해 책으로 변신하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 명시적·암시적으로 스며들거나 파편적으로 재활용되었다. 1992년 경매에서 이 원고를 손에 넣은 편집자 필리프 브르노는 이 소설 한국어판 말미에도 실린 해설에서 <죽은 자들의 포도주> 원고 일부가 직접 포함되거나 간접적으로 영향 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로맹 가리의 다른 작품들로 <가면의 생>은 물론 <자기 앞의 생> <유럽의 교육> <그로칼랭> 등을 꼽는다. 거꾸로 <죽은 자들의 포도주> 역시 다른 작가 및 작품의 영향을 보이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페스트 왕’, 고골의 단편 ‘코’, 그리고 프랑수아 라블레와 사드 후작 등이 대표적이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주인공 튤립이 철책을 넘어 공동묘지에 들어가서 겪는 환상적인 일들을 그린다. 죽은 자들의 영토인 그곳에서는 해골과 주검 들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고 말을 하며 생시와 다를 바 없는 욕망과 충동을 표출한다. 목매 자살한 이가 다시 목을 매고 싶어 하는가 하면, 생전에 창부였던 여자는 죽어서도 남자를 유혹하며, 수십명 수도사들이 “신을 딸딸이 쳐주”느라 밧줄을 잡아당기기도 한다. 무질서와 혼란, 공포와 블랙유머의 카니발을 보는 듯하다. 소설에서 인용하자면 “우리가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한없이 더럽고 저열하고 악취 나는 그 빌어먹을 것의 모든 구더기들과 해충들”을 무대에 올린 한바탕 소동극이 이 소설 <죽은 자들의 포도주>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마음산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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