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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늙은 제철소의 강직한 아름다움

등록 2019-01-18 06:00수정 2019-01-18 19:50

푈클링엔-산업의 자연사
조춘만 사진, 이영준 글/사월의눈·4만원

울산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조선소 취부사(철판 조각을 도면에 맞게 제작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로 취직했다. 사우디 건설현장에서 일할 때 사온 카메라에 취미를 붙였고, 결국 마흔살 넘어 대학 사진학과에 입학해 전문 작가가 됐다. 그래서 그에겐 이런 설명이 따라붙는다. “몸 속에 공장이 체화된 사람, 그 체화된 상태를 사진으로 남기는 몸짓이 체화된 사람”. 다소 생소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산업사진가’ 조춘만이다. 그는 압도적인 규모의 공장 구조물에서 강직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기계가 움직이며 뿜어내는 에너지를 사랑한다. 이른바 ‘산업미’에 충실한 사진을 찍어온 조춘만이 30여년 전 숨을 멈춘 공장, 독일 남부의 자를란트 푈클링엔 제철소(1873~1986)를 찍은 사진집을 내놨다. 사진비평가이자 ‘기계비평가’인 이영준이 용광로의 구조, 철의 종류(선철·주철·강철 등)와 만드는 방법, 조춘만 사진의 의미 등을 담은 해설을 붙여 완성도를 더했다.

1986년 가동이 중단된 푈클링엔 제철소엔 풀과 나무가 무성하다. 조춘만 작가
1986년 가동이 중단된 푈클링엔 제철소엔 풀과 나무가 무성하다. 조춘만 작가
2013년 프랑스 예술가의 소개로 우연히 푈클링엔을 만난 조춘만은 그뒤 5년 동안 20번 넘게 카메라를 메고 제철소를 방문했다. 독일이 영국 등 산업선진국을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던 19세기 중반 문을 연 푈클링엔 제철소는 이후 전쟁 특수를 타고(독일군 철모의 90%를 이곳에서 만들었다) 호황을 누리다 1970년대 이후 일본·한국 등과의 경쟁에서 밀려 문을 닫았다.

푈클링엔 제철소 전경. 조춘만 작가
푈클링엔 제철소 전경. 조춘만 작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는 푈클링엔 제철소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녹슨 파이프 사이에 자작나무의 흰 어깨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이끼가 푸른 침대처럼 돋아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는 공장 구조물을 파고들고 이끼의 습기는 콘크리트를 부식시키기에, 이곳에서 자연은 “산업유산의 적”에 다름 아니다.

선철이 만들어지고 나서 생긴 찌꺼기를 머리에 이고 나르는 여성들. 1890년께 풍경이다. 벨트쿨투르에르베 클링어 휘테, 자르슈탈 AG·페터 바케스 제공
선철이 만들어지고 나서 생긴 찌꺼기를 머리에 이고 나르는 여성들. 1890년께 풍경이다. 벨트쿨투르에르베 클링어 휘테, 자르슈탈 AG·페터 바케스 제공
이처럼 인공과 자연은 강렬한 대비를 이루지만, 따지고보면 철 또한 자연의 일부다. 철광석을 제련해 철(Fe)을 만들 때 쓰는 필수 재료인 석탄(정확히 말하면 코크스)은 식물에서 비롯됐다. 고생대에 퇴적된 식물 잔해가 석탄이 됐고 이 화석연료로 강철이 만들어졌으며 강철은 산업문명을 일궜다. 하지만 푈클링엔에서 보듯 산업문명의 정수인 제철소 또한 경쟁력이 다하면 어쩔 수 없이 자연에 몸을 맡긴다. ‘자연사(死)’를 맞은 산업의 역사가 ‘자연사(史)’가 되는 까닭이다.

제철소 공간 일부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미국 록음악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는 공장 내부 모습. 조춘만 작가
제철소 공간 일부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미국 록음악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는 공장 내부 모습. 조춘만 작가
이영준은 현재 울산 등 한국의 산업단지들이 ‘장년기’에 이르렀음을 짚으며 “산업의 증조할아버지에 해당하는 푈클링엔에서 산업의 노년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산업의 역사에 대한 예습으로.”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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