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이승우씨
“24년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제가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내고 싶었던 책은 거의 다 냈어요. 저는 복 많은 편집자죠.”
국내 출판계의 대표적인 인문학술 분야 편집자인 이승우 도서출판 길(이하 길) 기획실장 말이다. 그는 첫 출판사인 한길사에서 8년 동안 일한 뒤 2003년 길로 옮겼다. 이 기간 내내 서양 사상 명저 번역에 힘을 쏟았다. 특히 길에서 낸 번역본은 전공자가 그리스어나 라틴어 원전을 직접 번역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원의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런 노력은 한국 번역 출판의 토대를 다지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평이다. 최근 라틴어 원전과 한국어 번역을 나란히 실은 대역본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크리스티안 볼프 지음, 이동희 옮김)을 출간한 이 실장을 22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이 책은 길이 2006년과 2015년에 낸 <수사학-말하기의 규칙과 체계>(키케로 지음, 안재원 옮김), <군주론>(마키아벨리 지음, 곽차섭 옮김)에 이은 세 번째 대역본이다. 올 상반기에만 스피노자의 <지성개선론> <정치론> 등 4권을 더 내는 등 대역본을 꾸준히 늘릴 계획이란다.
“제가 처음에 안재원 교수에게 대역본을 제안했을 때 안 교수조차 무모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도 왜 대역본을? “한길사 시절부터 꿈이었죠.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엔 이런 대역본 번역이 많아요. 고전문헌학자인 안 교수를 만나 텍스트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죠. 어휘 하나하나를 엄정하게 다뤄야 한다는 걸요. 사서삼경을 읽더라도 원문인 한자를 보잖아요. 서양 학문 세계에서 라틴어는 한자와 같아요. 라틴어 원전을 직접 읽고 싶은 독자의 욕구도 있다고 봤죠.” 그의 예측은 엇나가지 않았다. <수사학>은 그간 5천 권 이상 팔렸단다. “고전은 보증수표이죠. 잘 만들면 반드시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고급독자가 우리 사회에 천명 가량 됩니다. 한길사 다닐 땐 2~3천명은 됐죠. 그동안 독자도 하향 평준화됐다고 할까요.”
그는 한길사 사상 명저시리즈 ‘한길그레이트북스’ 기획에 참여했고 길에서도 같은 성격의 ‘코기토 총서-세계 사상의 고전’ 시리즈를 기획해 지금껏 40권을 냈다. “직원 3명인 길 출판사에서 사상 고전 40권이 나온 것은 제가 생각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의 표현대로 ‘코딱지만 한’ 출판사가 내는 고전 시리즈 번역이지만 번역이나 해제의 질 측면에서 대형 출판사 기획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자부심도 크다.
이런 책의 완성도는 비즈니스와도 배치되지 않았다. “2003년 이후 도매상 송인서적 부도 사태 영향이 있었던 작년을 빼곤 매출 상승세가 꺾인 적이 없어요. 가장 효자는 2만권 이상 나간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이죠. <자본>(칼 마르크스, 전 5권)도 합쳐 그 정도 나갔고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베냐민)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도 1만5천권가량 팔렸죠. 여기서 얻은 수익으로 다른 책들을 만들 수 있었죠.”
인문학술 분야 전문 기획 24년째
2003년부터 ‘서양사상’ 출판 집중
그리스·라틴어 등 ‘원전 번역’ 원칙 원전-한국어 번역 나란히 ‘대역본’
전공자도 무모하다 했지만 성공적
“학술출판 가능성 보여주고 싶어” 회사를 옮길 때 큰 출판사로 갈 수도 있었지만 작은 출판사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란다. “제가 내고 싶은 책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언론인 출신인 박우정 대표가 저를 100% 믿어줍니다. 대표가 직접 최종교정을 다 읽고 세세한 편집 오류도 잡아냅니다. 저자나 편집자들이 놀랄 때가 많죠.” 그가 전공자의 원전 번역을 고집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한길사 시절에 학자부터 운동선수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평전 번역 시리즈 100권을 기획했어요. 독일 로볼트 출판사 책이라 별생각 없이 서울 지역 독문과 교수들에게 맡겼는데 낭패를 본 적도 있었죠. 그때 번역은 해당 분야 전공자이면서 우리말 실력도 최고인 분에게 맡겨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죠. 학술 책은 더더욱 그래요. 비전공자 번역은 학술용어 해석에서 반드시 들통이 납니다.” 그는 요즘 출판계에서 ‘편집자의 능력은 독자가 원하는 책을 내는 것’이라고들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출판은 우리 사회의 지적토대를 만드는 공사입니다. 우린 서양 중세철학자라고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우구스티누스 정도만 알아요. 하지만 둘 못지않은 쟁쟁한 중세철학자들이 많아요. 요즘 서구 학자들은 중세 때 서양세계와 이슬람과의 지적 만남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런 걸 하나도 몰라요. 편집자가 지적 호기심을 갖고 이런 학술 활동의 결과물을 출판을 통해 알려야죠.”
가장 보람을 느낄 때? “철학과 사회학 분야에서 길의 대표 필자인 김상봉 교수와 김덕영 교수 모두 음지에 계실 때 저랑 인연을 맺었어요. 그분들과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가는 게 가장 큰 행복이죠. 길에서 낸 베냐민 선집 기획자 최성만 교수도 한길사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죠.” 독자 반응도 비슷하단다. “김상봉, 김덕영, 이정우 선생 같은 수준 있는 국내 필자의 책을 내면 꼭 반응이 와요. 소중한 학자를 발굴해 고맙다고요. 우리 책 중에 절판본도 꽤 되는데 다시 내달라는 독자나 필자 요청을 저작권 재계약 문제 등으로 다 수용하지 못하는 점은 안타깝죠. 작은 출판사의 비애입니다.”
길을 푯대 삼아 제2 제3의 길 출판사가 이어지길 바란다는 말도 했다. “학술 출판은 블루오션입니다. 하면 되는데 아무도 하지 않거든요. 이 분야에 들어오면 의미도 찾으면서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후배 출판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책과의 만남은 언제부터? “고교 때까진 책을 읽지 않았어요. 성균관대 유학과에 들어갔는데 형이 한길사에서 나온 <국토와 민중>(박태순 저)이란 책을 선물하더군요. 고교 때 배운 것과는 시각이 너무 달랐고 발로 쓴 책이더군요. 그때부터 책에 흥미를 느꼈어요. 유학과 전공 수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역사나 서양철학, 사회학, 국문학 관련 수업을 대학 때 많이 들었어요.”
대학을 나온 뒤엔 공무원 시험을 1년 준비하기도 했단다. “일하면서 책도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7급 공무원 시험을 한번 봐 떨어졌어요.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문학평론가 등단을 꿈꾸며 염상섭, 채만식 전집을 읽었으니 떨어지는 게 당연했죠. 하하. 그때 마침 한겨레신문에 나온 한길사 공채 광고를 봤어요. 김언호 대표와 세 번 면접을 보고 뽑혔죠. 150~200명이 지원했는데 저 혼자 붙었어요. 김 대표께 많이 배웠어요. 김 대표가 국내 출판계 최초로 출판사에 기획실을 따로 만들어 저를 배속시켜주었죠. 그 뒤로 편집보단 기획 쪽 일을 계속 해왔죠.”
대역본을 밀어붙인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단다. “요즘 국내 철학회 학술대회를 가 보면 40대 학자가 가장 어립니다. 인문 학술 쪽 학문 후속 세대가 끊기고 있어요. <군주론>을 이탈리아어로 전공한 학자가 앞으로 다시는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어요. 중세철학 전공자도 그렇고요. 지금 할 수 있을 때 하자고 생각하는 이유죠.”
학술 출판의 주체로서 당국에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었다. “우린 학술정책에서 출판은 없어요. 학술 출판은 마인드 제로입니다. 수백억원을 투입한 명저 번역사업을 보세요. 선정 과정도 불투명하고 사후 관리도 안 되고 있어요.” 학계에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곽차섭 교수가 <군주론>을 번역하면서 그간 ‘힘’으로 번역해 온 비르투(virtu)를 ‘덕’으로 옮기면서 그 근거를 자세히 밝혔어요. 그런데도 후속 논쟁이 없어요. 우리 학계는 진지한 토론 문화가 없어요.”
그가 만난 최고의 번역자는 누구일까? “제가 꼽는 인문 학술 쪽 최고 번역자는 김덕영 교수입니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그래도 대가급 번역자들이 많아요. 하지만 솔직히 우리나라 사회과학계에서 엄밀한 번역을 하는 분은 거의 없어요. 그런 점에서 김 교수는 사회과학계 최고의 번역자입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게오르그 짐멜의 <돈의 철학>과 <렘브란트> 번역으로 그 정점에 올랐다고 봐요. 내년엔 막스 베버 서거 100년을 기념해 베버의 대표작 <사회과학 방법론> 번역을 하고 계시죠. 그가 최고의 번역자인 다른 이유는 저술과 번역 작업을 순조롭게 병행하는 국내 유일의 학자라는 점이죠. 번역을 통해 공부하면서 자신의 연구성과 결과물인 저서에 반영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저자와 책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베냐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입니다. 베냐민은 역사철학 테제에서 ‘진보란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 역사는 언제라도 파국을 맞을 수 있다’고 썼어요. 역사를 큰 관점에서 보도록 해주죠.” 그는 한길사 시절 최성만 교수 번역으로 나온 <한 우정의 역사-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게르숌 솔렘 지음)도 자신이 직접 기획한 책이라고 했다.
계획을 물었다. “요즘 제 관심사는 중세철학입니다. 우리는 르네상스를 그림으로만 알아요. 독자들이 모르는 사상사로서 르네상스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르네상스 사상은 다 엄밀한 글자 연구에 토대를 두고 있죠. 부산 신라대의 임병철 교수와 르네상스 3부작을 내기로 계약했어요. 두 권은 번역이고 한 권은 임 교수 저술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이 22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길에서 내는 대역본 시리즈 세번 째 책인 <중국인의 실천철학에 대한 연설> 표지.
2003년부터 ‘서양사상’ 출판 집중
그리스·라틴어 등 ‘원전 번역’ 원칙 원전-한국어 번역 나란히 ‘대역본’
전공자도 무모하다 했지만 성공적
“학술출판 가능성 보여주고 싶어” 회사를 옮길 때 큰 출판사로 갈 수도 있었지만 작은 출판사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란다. “제가 내고 싶은 책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언론인 출신인 박우정 대표가 저를 100% 믿어줍니다. 대표가 직접 최종교정을 다 읽고 세세한 편집 오류도 잡아냅니다. 저자나 편집자들이 놀랄 때가 많죠.” 그가 전공자의 원전 번역을 고집하는 데는 사연이 있다. “한길사 시절에 학자부터 운동선수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평전 번역 시리즈 100권을 기획했어요. 독일 로볼트 출판사 책이라 별생각 없이 서울 지역 독문과 교수들에게 맡겼는데 낭패를 본 적도 있었죠. 그때 번역은 해당 분야 전공자이면서 우리말 실력도 최고인 분에게 맡겨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죠. 학술 책은 더더욱 그래요. 비전공자 번역은 학술용어 해석에서 반드시 들통이 납니다.” 그는 요즘 출판계에서 ‘편집자의 능력은 독자가 원하는 책을 내는 것’이라고들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요. 출판은 우리 사회의 지적토대를 만드는 공사입니다. 우린 서양 중세철학자라고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우구스티누스 정도만 알아요. 하지만 둘 못지않은 쟁쟁한 중세철학자들이 많아요. 요즘 서구 학자들은 중세 때 서양세계와 이슬람과의 지적 만남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런 걸 하나도 몰라요. 편집자가 지적 호기심을 갖고 이런 학술 활동의 결과물을 출판을 통해 알려야죠.”
이승우 실장 기획으로 나온 길 출판사 책들. 이승우 실장 제공
이승우 실장은 편집자보다는 기획자란 이름으로 불린다. 어떤 차이일까? “저는 실력 있는 숨은 학자 발굴에 신경을 많이 쏟는 편입니다. 새로운 연구영역이나 주제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신진 연구자의 새로운 연구성과를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책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죠.”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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